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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을 살리자. 정치인들이 가장 즐겨 쓰는 구호 중 하나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여야의 대민 읍소용 단골메뉴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만큼 정치가 꼭 챙겨야 할 중대사이고 대중적 호소력이 높은 메시지란 얘기다. 최근엔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이 나서 민생 카드를 제시했다.

이 민생 카드가 예사롭지 않다. 우선, 민생 살리기 대 세월호 참사 특별법이란 이분법을 내세웠다. 꽉 막힌 세월호 참사 특별법 정국이 민생 살리기 법안을 통과시켜야 할 국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야당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가능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이들을 지지하는 국민을 반민생세력으로 몰아가는 편 가름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부자특혜법이란 비판을 받을 소지가 다분한 법안들을 민생법안이라며 내놓았다. 병원의 돈벌이를 위해 원격진료와 의료영리화를 추진하고 기업을 위해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를 폐지하고 학교 앞에 관광호텔을 지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들 앞에 민생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국민을 가르고 부자에게 혜택을 주는 정치가 과연 민생을 살리는 정치인지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민생이란 개념에 주목하고 이를 민생주의라는 정치노선으로 끌어올린 선구자는 쑨원이다.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동아시아에 공화제의 바람을 몰고 온 그가 내세운 이념이 바로 삼민주의다. 서양 근대 혁명의 이념에 동아시아 혹은 중국적 현실을 녹여낸 삼민주의에는 민족주의, 민권주의와 함께 민생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 (출처 : 경향DB)


쑨원에 의하면, 민생 문제란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발명되어 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게 되면서 새로이 대두한 사회문제다. 고통받는 인민의 생활 문제, 즉 민생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는 민생주의는 분배의 사회화로부터 출발한다. 분배의 사회화란 요즘 말로 경제민주화다. 쑨원의 ‘민생 살리기’의 경로는 명쾌하다. 먼저, 상인의 독점을 없애고 자본가에게 소득세와 상속세를 더 많이 거두어 국가의 재정 수입을 증대시킨다. 이 수입으로 교통과 운수를 공유화하는 한편, 노동자의 교육과 위생 그리고 공장 설비의 개선에 힘써 사회생산력을 증대시킨다. 사회생산력이 커지면 자본가는 큰돈을 벌 수 있고 노동자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자본가가 노동자의 생활 개선에 힘써 노동생산력을 높이면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하니, 이는 곧 자본가에게도 이익이 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익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면 상호간의 충돌을 피할 수 있다.

정치적 변수가 고려되지 않은 경로이나, ‘민생 살리기’가 추구해야 하는 분명한 방향은 제시하고 있다. 민생 문제의 해법은 결국 공평하게 나누는 것에서 시작되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에 있다는 사실이다. 쑨원은 이를 대동주의라 했다. 그는 <예기>에 나오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즉 ‘천하는 만인의 것이다’라는 사자성어를 신념으로 삼았는데, 민생주의에도 이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담았다. 쑨원은 1920년 동아일보 창간호에 바로 이 ‘천하위공’이란 휘호를 써 보내 한국인에게도 대동의 세상이 오길 염원했다. 쑨원의 민생주의에 대한 해석들도 늘 공생과 상생의 정신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갖는 결함을 모두 극복하고자 한 노선이라 평하기도 한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평등을 동시에 보장하는 대동 세계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대동의 이념으로 탄생한 민생주의가 2014년 대한민국에서는 편 가르기의 담론으로, 그리고 강자를 위한 특혜를 대변하는 개념으로 뒤틀려 재현되고 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용인하는 민생은 민생이 아니다. 이를 강조했던 쑨원에게 ‘민생 살리기’를 위해 오늘의 정치가 할 일을 묻는다면, 그는 약자인 중소기업과 강자인 대기업이 공존하며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공생의 문을 열어주고, 노사가 함께 복지와 생산력 증진에 힘쓰며 사회 통합을 도모할 수 있는 상생의 길을 닦아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민생은 곧 공생과 상생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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