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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고들 한다. 권력이 머무는 그곳을 두고 말이다. 아홉 겹 담장이 첩첩 둘러싼 크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음모·질시·암투 같은 단어들이 함께 떠올려지듯 세상과 떨어진 은밀함에 대한 이야기다. 성벽이 하도 높아서 바람에 실린 저잣거리의 숨소리도 아홉 번 팍팍한 다리를 쉬고 서야 갈 수 있는 심처(深處)라고 한다.

권력은 속성상 ‘비밀’과 친근하다. 아니 친하고 싶어 한다. “위엄을 이룬 군주는 약속을 가벼이 하고 간교함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법을 알며 공허한 원칙들에 얽매인 자들을 이긴 사람들”(마키아벨리 <군주론>)이기에 권력은 솔직할 수도 친절할 수도 없을 터이다. ‘비밀’이 특권처럼 비치는 세태 탓도 있을 게다.

<군주론>과 함께 통치술의 명저로 꼽히는 <한비자>에서도 신하를 다루는 세 가지 책략 중 하나로 ‘심장불로지술(心藏不露之術)’을 거론한다. ‘왕이 자신의 감정을 감춰 남이 도무지 자기 생각을 알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란 의미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지난 22일 “박근혜 대통령의 경계심 많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리더십은 슬픔에 잠기고 양극화된 국가를 치유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월호 참사, 비극으로 단련된 박 대통령에게 부담되다’라는 ‘스페셜 리포트’에서였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박근혜 정부 미스터리의 상징은 ‘인사(人事)’일 것이다. ‘대통령의 7시간’ 논란으로 ‘기밀주의’의 단면이 도드라지긴 했지만, 인사 문제는 일상(日常)이 된 점에서다. 짐작도 못한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는가 하면, 며칠 못 가 사라진다. ‘돌연 사퇴’ ‘참사’는 인사의 관용어처럼 됐다.

최근 송광용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사퇴 파동은 ‘인사 무능’의 종합판이다. 수석 임명 사흘 전 경찰 소환조사를 청와대는 “몰랐다”고 하고, 경찰은 기소 직전까지 그가 청와대 수석인지 “몰랐다”고 한다. 검증 과정에서 송 전 수석은 경찰조사를 받은 일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고도 한다. 변명인지 해명인지 뒤늦은 청와대의 애매한 설명에서다. 그 속엔 김학의적인 ‘도덕 불감’과 세월호로 민낯을 드러낸 해경의 나태·무능이 공존하고 있다.

이 모든 기현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남는 것은 ‘도대체 인사는 누가 하는가’라는 의문이다.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 파문 때 여권의 각종 실세 그룹들은 서로 ‘추천자가 아니다’라며 손사래 치기 바빴다. 정성근 문화부 장관 지명을 두고선 청와대 주변에서조차 “대선캠프에서 뛴 사람들은 ‘헉’ 했다. ‘무슨 장난도 아니고 정성근이면 거의 (캠프) 말단인데 갑자기 장관이라니’ 이런 분위기”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인사 때마다 ‘설설설’들은 속칭 ‘찌라시’들의 주요 공급원이 됐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궁금하지만 청와대 모습은 ‘구중궁궐’ 딴 세상이다. 문책도, 사과도, 설명도 없다. “인재들이 청문회가 두려워 공직을 피할까봐 걱정”(박 대통령)이라는 ‘버럭’이라도 나오면 고마울 지경이다. 최소 저잣거리의 심상찮은 공기는 ‘안다’는 표시가 아닌가. 누가 한 인사인지 모르니, 책임도 “없다”고 서로 미룰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속 터질 노릇이다. 청와대가 그들을 ‘김정은 따라다니는 노동신문 기자 취급하는 거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 사면 관련 발언 (출처 : 경향DB)


1982년 2월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특전사 대원 53명이 탄 군수송기가 추락해 전원 사망한다. 2010년 천안함 침몰로 산화한 46명보다 더 많은 장병이 희생된 참사였다. 하지만 사건은 7년이 지난 1989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봉황새 작전’이란 작전명으로 제주도 연두순시를 앞둔 전두환 전 대통령 경호에 투입됐다가 벌어진 참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국방부는 유족들에게 대통령 경호가 아닌 ‘대침투훈련’ 중 사망이라고 통보했다.

전두환 정권이야 권위주의 시절 정통성 없는 정권이니 그렇다 치자. 숨기고 감추고 뭉개야 할 것이 많았을 게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다르다. 민주적 경쟁에 따라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정부다. 뭘 해도 40%의 국민은 ‘묻지마 지지’를 하는 정권이다. ‘심장불로’로 속내를 감추며 국민들을 ‘다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에 항상 실패한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늘 입에 달고 다니며 사랑하는 국민을 향해 ‘말하기’에 실패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지금은 마키아벨리의 시대도, 한비자의 시대도 아니다. ‘친절한 근혜씨’가 보고 싶은 이유다.


김광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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