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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관료들은 대체로 무능하거나 복지부동하거나 혹은 그때그때의 보신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다. 일반인이 한나절 만에 찾아내는 굽은 지팡이는 어떤 관료의 눈에도 띄지 않으며, 남의 벼모종을 먹어치우는 소는 명령이 거듭되어야만 제대로 단속된다. 눈치 빠른 관료는 있지도 않은 백마가 방금 지나갔다고 보고하며, 제후가 거짓으로 손톱을 잃어버렸다고 할 때 좌우의 측근들은 자기의 손톱을 잘라 바친다.

지난 12일 방송통신위원회가 확정의결한 전기통신사업법시행령은 <한비자>의 이런 비난을 자초한다. 이 시행령은 이동통신사들이 청소년에게 휴대전화를 판매할 때 음란물 차단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하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주기적으로 감시하도록 하였다. 또 그 앱이 삭제되거나 작동되지 않을 경우에는 부모에게 알리도록 하는 의무조항까지 덧붙였다.

이런 규정은 모법의 위임 범위를 넘어선다. 지난해 10월 개정된 전기통신사업법은 차단 앱의 ‘제공’만 규정할 뿐, 그것을 ‘설치’하고 상시적으로 감시하는 조항은 두지 않았다. 게다가 특이한 앱스토어 정책을 사용하는 아이폰의 경우나 요즘 성행하는 통신판매와 같은 경우에는 이런 앱의 설치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기에 앱의 설치 여부나 작동기간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휴대전화의 운영체제를 바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까지 감안하면 이 정책은 차별적인 동시에 집행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관료들이 만들어낸 이런 식의 황당한 규제들은 비일비재하다. 자정이 되면 어린 게이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고 해서 ‘신데렐라법’이라 이름 붙은 셧다운제를 비롯해, 애매모호한 잣대에다 실질적인 검열이 되어버린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제도 같은 것들은 그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별다른 효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청소년 보호”라는 미명하에 사생활의 비밀이나 개인정보자기결정권, 혹은 알 권리와 같은 기본적 권리들을 무참하게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정부가 부모-자녀의 관계에까지 개입하여 해체해버린다는 점에 있다. 청소년 보호라는 말이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면 그 책무와 권리는 부모에게 있어야 한다. 헌법재판소도 말하듯 부모의 양육권은 무엇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차단 앱의 설치 문제는 자녀와 부모 간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행령은 이런 선택의 기회를 박탈한다. 부모의 몫이어야 할 자녀양육 문제를 정부가 가로채 자녀의 스마트폰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며 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려 하는지 낱낱이 감시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시대의 우리 부모들과 자녀들은 이런 고민을 함께할 시간이 없다. 신자유주의의 압박은 모든 부모들이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로부터 숨돌릴 틈도 못 찾게 만들고, 적자생존만을 외치는 우리 교육체계는 자녀들조차 부모의 시선 밖에서 일상을 보내게 한다. 여기서 부모는 노동자이거나 가계의 경영자 내지는 자녀 입시의 관리자 수준으로 내몰릴 뿐이다. 관료들의 정책 아이디어가 절실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집 밖으로 내몰린 부모들에게 제자리를 찾게 하며, 학생 혹은 청소년으로 호명되는 우리 아이들에게 자녀라는 이름을 복원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이 시행령은 이런 요청을 정면에서 거부한다. 정부가 스스로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고 나서면서, 서로 설명하고 이해하며 공감함으로써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가족의 기회를 박탈해버린다.

셧다운제에 항의하는 청소년들이 여성가족부 앞에서 밤샘게임 시위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비자>가 말하는 예의 관료들은 정확하게 이 지점에 자리한다. 그들은 그저 이런저런 제도나 정책 수단들을 동원하여 모든 청소년들에게 대리부모의 통제 아래 들어서기를 명령한다. 관료들의 무능함이나 약삭빠름이 청소년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가족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가치조차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셧다운제도가 그러했듯, 차단 앱의 설치와 실시간 감시 또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제도를 만든다는 것만으로 관료들은 자기 자리를 보전하게 되며, 부모들은 자녀와의 대화보다는 내일 아침의 출근 준비에 전념할 것을 명령받게 된다.

그뿐 아니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기에 세간의 걱정거리는 여전히 남아 있거나 혹은 더 커져만 간다. 그리고 그 걱정을 핑계로 관료들은 부랴부랴 또 다른 방안을 찾아 나선다.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 우기거나 이것을 저것이라 둘러대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정책실패-정책과잉의 악순환을 무한반복한다.

이 시행령은 세월호 참사 1주년이 되는 4월16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조차도 책임지지 못했던 이 정부가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윽박지른다. 문제의 본질에 대한 통찰도, 그 시행 결과에 대한 예측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해야 하기에 만들었고 만들었기에 시행한다. 그뿐이다. 이것이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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