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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11일)이면 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내려진다. 낙태죄에 대해 위헌 내지 헌법불합치 선고가 내려졌을 경우 행해져야 한 것들은 무엇인가. 먼저 해당 형법조문의 삭제 혹은 개정과 더불어 모자보건법과 그 시행령 등 개정이 필요할 것이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는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는 사유들이 규정돼 있다. 이 사유들이 너무 좁거나 현실의 임신중절과 너무 괴리되어 있다는 비판이 많았다. 만약 낙태죄가 폐지된다면,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마련하기 위해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임신주수를 세 시기로 나누어 임신 12주, 24주, 그리고 36주로 분류해서 접근하는 이른바 ‘3분기법’을 취할 것인지, 임신중절의 ‘사회경제적 사유’를 포함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예컨대 임신 12주까지는 임부의 의사를 중심으로 임신중절을 허용하지만, 임신 중기나 후기에는 의사(들)의 개입 정도를 달리하는 등의 방법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8년 연구결과에서 나타나듯이, 임신중절의 고려사유는 ‘경제상태상 양육이 힘들어서’가 46.9%로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자녀계획(자녀를 원치 않아서, 터울 조절 등)’과 ‘학업, 직장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가 각각 44.0%, 42.0%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임신중절 정책에 사회경제적 사유들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이런 사유들을 경감시킬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마련한다면 출산 선택이 증가할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3월 30일 서울 도심에서 낙태죄 관련 찬반 시위가 열렸다.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위 사진)와 광화문네거리 원표공원에서 열린 낙태 반대 집회. 연합뉴스
둘째, 낙태죄 폐지 이후의 ‘가치론’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과제가 중요하다. 그동안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권리는 주로 ‘임부의 자기결정권’으로 말해졌다. 실제로 임신과 출산은 임산부의 건강뿐 아니라 가족, 노동, 학업 등 전방위적으로 존재를 재구성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낙태결정권은 ‘운명결정권’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낙태금지 정책이 여성에게 가져오는 폐해가 극심한 것으로 근본적으로 성차별적이라고 보는 법학자가 다수 있다. 나아가, 나를 포함한 일군의 사람들은 낙태 문제를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s)’이라는 견지에서 바라본다. 재생산권이란 단지 아기를 낳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권리도 뜻한다. 재생산권이란 성적관계(sexual relations)에서의 젠더평등권과 자기결정권, 임신과 출산에서의 자기결정권과 정보 및 의료서비스 접근권, 낙태 혹은 출산 이후 국가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하는 권리의 세트이다. 이는 남성시민도 향유해야겠지만 여성시민의 인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권리목록이다. 또한 이는 재생산정책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빈곤, 비혼, 장애나 동성애 시민 등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자녀 출산이란 주로 법률혼을 한 비장애인 이성애 가족에게 주어진 특권 같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혼인 임신 여성이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되고, 사회적으로도 차별의 시선이 따가워 태아를 중절하고자 할 때 그는 사회에다 책임을 묻기는커녕 낙태라는 범죄행위를 숨어서 치러야 했다. 낙태 사실을 공표할 수도 없고, 몸과 마음의 고통을 위로받을 곳도 없는 ‘이상한’ 고통을 겪어내야 했다. 시민들의 재생산권을 공평하게 지원하기 위해 국가는 먼저 ‘정상가족’ 모델로부터 빠져나와야 할 것 같다.
셋째, 재생산권리는 형법이나 모자보건법뿐 아니라 헌법에서부터 그 정신이 흘러내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2018년 3월 국회에 제출했던 대통령 발의 개헌안에는 최초로 재생산권리에 버금하는 조문이 마련된 바 있어 주목된다. 제35조 제3항에 “모든 국민은 임신·출산·양육과 관련하여 국가의 지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였고, 제33조 제5항에는 “모든 국민은 고용·임금 및 그 밖의 노동조건에서 임신·출산·육아 등으로 부당하게 차별을 받지 않으며”라고 규정하였다. 인구의 재생산은 더 이상 국가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 삶의 질, 여성과 남성이 같이 분담하는 평등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넷째, 새로운 임신중절의 정책에서 의료적, 경제적, 사회적 상담이나 임신허용의 기준 등이 매우 중요하겠으나 이 프로그램 역시 재생산권에 입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성성(sexuality)과 피임교육에 대한 전면적 개혁과 함께 임신중절 및 중절 이후의 적응에 대한 교육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교육은 젠더평등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기존의 ‘성 건강’은 ‘재생산 건강’으로 재규정되고, ‘재생산 건강’은 건강을 넘어 평등과 정의(正義)의 시각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낙태죄 폐지는 그동안 지연되어 온 생명의 재생산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는 첫 단추가 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이런 사회 시스템을 생명중심적으로 만드는 일이 다름 아닌 생명존중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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