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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가운데 의미있는 판결이 하나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2민사부는 지난 1월20일, 한국 내 미군 기지촌 ‘위안부’ 피해 여성 57명의 정신적 피해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을 판결했다. 2014년 6월25일 기지촌 미군 위안부 122명과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새움터, 국가배상소송공동변호인단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첫 번째 판결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1월24일 공식 논평에서 제기된 것처럼, 기지촌의 조성 및 관리·운영 등 성매매 정당화·조장에 관한 직접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1977년 법령이 정비되기 이전 성병 감염인에 대한 격리 수용에 대해서만 책임을 인정하였다는 점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판결은 두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국가의 강제적 성병관리가 위법 행위였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국가가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했고, 성병에 감염됐다는 진단을 받거나 미군에게 지목된 위안부들을 ‘낙검자 수용소’에 강제로 격리 수용해 치료한 정부의 조치가 위법했다”고 명시했다. 미군 기지촌 주변 성매매에 대한 국가의 체계적 개입과 관리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1970년대 미8군 주변 기지촌의 미군 전용 유흥업소. 경향신문 자료사진

또 다른 의미는 국가 권력기관에 의한 국민의 불법 수용과 가혹행위 등 중대한 인권침해 사항은 공소시효 적용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는 점이다. 피고인 정부 측은 소송 과정에서 손해배상 채권은 시효가 5년이므로 원고 여성들의 권리는 이미 소멸됐다고 주장해왔지만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억압된 사회적 타자들의 목소리에 부분적으로나마 응답함으로써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무수히 자행된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의 문을 연 것이다.

판결의 내용 여부를 떠나 사회적으로 볼 때 소송 자체가 지니는 의미 또한 간과될 수 없다. 이번 소송은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경험에서 출발한 대안적 역사 인식의 가능성을 열었다. ‘더럽고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라 구조적 피해자로서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이 제기한 소송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깊게 각인된 억압과 고통, 폭력과 상처의 기억들을 언어화하고 새롭게 이해하게 하는 역사적 과정과 깊게 연관된다. 지속적인 내러티브 과정을 통해 피해자가 생존자로, 생존자가 다시 역사를 재구성하는 운동의 주체로 변모하는 과정을 우리는 이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통해서 목도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이번 소송은 피해자 정체성을 재구성할 기회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당사자 스스로 대항적 역사 쓰기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이번 소송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원고들은 성매매가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이를 관리, 묵인, 조장했으며 이로 인해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의혹-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을 역사적 진실로 규명하고자 했다.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폭압에 동조하고 심지어 편승하여 자국민들 중 특정 집단을 배제, 차별, 착취하고 인권침해를 일삼으며 심지어 이를 통해 이득을 취한 국가가 과연 국가인가? 보다 근본적으로, 국가란 무엇인가? 나아가 여성은 온전한 국민인가? 어떤 여성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우회적으로 내포한 이번 소송은 젠더와 국가 간 관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고 여성(성)의 (재)구성과 활용을 통한 국가통치 전략을 폭로한다. 그리고 아프게 다시 질문한다. 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의 역사를 부인하고 이들에 내재한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이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가? 특정 집단에만 정의롭고, 배제된 집단에는 불의한 국가를 우리는 어떻게 해체하고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번 소송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성을 요구한다. 이들의 경험은 우리가 만든 구조를 먼저 통찰해야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신매매, 미성년 성매매와 성폭력, 강제노동, 모독, 비하, 멸시, 배제, 감금, 폭력, 임금착취 등 각종 인권침해로 점철된 미군 위안부 문제는 기실 우리 모두의 공모로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성매매 제도의 부끄러운 역사적 실제를 고스란히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미군 기지촌 위안부 문제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시기에 나타난 특정 타자의 것이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여성(성) 보편의 문제 중 하나며, 중층적 성차별적 구조의 중핵에 위치한다.

성별과 계층에 따라 과거를 기억하고 전승할 자격조차 달라지는 불평등한 대한민국의 모순을 우리는 다시 반복할 것인가. 희망의 촛불을 다시 조용히 켜본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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