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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에 대한 김기종씨의 ‘피습’ 사건이 있었다. 피습 사건 자체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의 대응과 일반 국민들의 반응 과정에서 다양한 논란이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시야에서는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정부·여당은 조사도 생략한 채 즉각적으로 테러로 규정했고, 종북좌파의 행위로 배후까지 규정했다. 야당까지도 여당의 발빠른 프레임에 앞뒤 생각 없이 덥석 뛰어들어 테러라고 따라 불렀다. 또 말려든 것이다. 야당은 뒷부분, 즉 종북좌파의 숙주라는 공세만 피하려 했다. 적어도 권력경쟁과 술수에서는 본능적으로 현 권력이 한수 위임을 한 번 더 과시했다.

이번 행위를 테러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함을 넘어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행위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을 종합할 때 김기종씨의 행위는 폭력이지만 테러라고 볼 수 없다. 모든 테러리즘은 폭력이지만, 모든 폭력이 테러리즘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테러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리 계획한 후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해 대중을 공포에 몰아넣음으로써 특정 행위를 하도록 만들거나 또는 하지 못하게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유엔 안보리나 테러리즘에 의한 피해에 이골이 난 미국 정부가 제시한 정의는 테러의 표적을 민간인으로 한정함으로써 더욱 엄격하게 적용한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가 테러라고 맹목적이다시피 고집하는데도, 정작 피해당사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은 테러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사실 자체만 놓고 봐도 테러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덩달아 테러로 규정했다가는 테러리스트와 배후세력에 대해 반드시 보복해야 하는 부담까지 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미동맹에 대한 테러라고 규정하는 한국정부의 오버액션이 오히려 한·미관계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데이비드 스트라우브가 날린 돌직구처럼, 이번 사건은 한 정신 나간 사람의 개별 폭력적 행동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매카시즘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바닥 모르게 추락하던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지지율을 손쉽게 끌어올리고, 다가오는 보궐선거를 유리하게 끌어가려는 정치적 공세가 깔려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그들이 어려울 때마다 믿고 사용해 온 방법은 이번에도 기대에 부응하듯 반짝 효과를 과시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의 전개과정을 보면, 박근혜 정부의 이러한 무리수에서 ‘테러’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인 ‘terrere’가 가리키는 지점이 보인다. 테러라는 단어의 표면적 의미는 공포이며, 역사적인 배경은 그 공포가 바로 국민에 대한 국가의 공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여전히 테러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테러가 원래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행위인 것이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지만, 민주주의 도래 이후 국가에 부여된 공공성의 확장으로 국가의 대국민 테러행위가 비정부적 행위자에 의한 테러행위보다 덜 부각될 뿐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사적권력들도 공공성을 위장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이 우리 앞에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 정부는 테러의 원래 뜻을 되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러는 동안 국가권력의 공공성을 훼손하고, 민주주의 원칙에 치명상을 입히며, 국가관계와 국익에도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왼쪽)가 지난 14일 오후 경찰 경호를 받으며 애완견과 함께 청와대 인근을 산책하고 있다. 리퍼트 대사는 청와대 분수대 광장을 지날 때 시민들이 환호하자, “안녕하세요”라고 화답했다. (출처 : 경향DB)


1950년 2월 국무부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존 매카시 상원의원의 의회연설 발언이 매카시즘 광풍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그는 205명의 명단이 적힌 종이를 증거인 양 들고 연설했지만, 사실은 그의 손에 든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애용(?)한다는 그 노트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 종북의 객관적 증거가 적혀 있을까? 매카시 의원처럼 빈손일 것이다.

종북몰이가 일단의 원하는 목표를 달성한 듯 조금 잠잠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거부감과 공포감을 자극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는 매카시의 유령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며 떠나지 않고 있다. 2015년 봄의 한국사회에 여전히 ‘유령은 살아있다!’ 테러의 먹잇감을 찾아 24시간 비상대기 중이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재등장할 것이다. 정치력도 외교력도 이미 바닥을 보인 박근혜 정부로서는 손만 뻗치면 닿을 곳에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쉽게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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