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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더 플랜>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발표되었다. 18대 대선의 개표과정에 치밀한 조작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영화였다. 핵심적인 근거로 제시되었던 것은 1.5로 계산된 ‘K값’. 요약하자면, 투표지분류기가 ‘미분류’로 판정해서 수개표한 표 중 박근혜 후보의 표 비율이 문재인 후보의 표 비율보다 1.5배 정도 되었다는 뜻이다. 한 달 후 19대 대선이 치러졌고, <뉴스타파>의 분석에 따르면 이른바 K값은 1.6으로 계산되었다. ‘미분류’ 표 가운데 홍준표 후보의 상대적 표 비율이 문재인 후보의 표 비율보다 1.6배 높았다는 의미이며,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문재인 후보의 상대적 표 비율은 홍준표·안철수 후보보다는 낮게, 유승민·심상정 후보에 비해서는 높게 나왔다. <더 플랜>의 주장 근거를 무너트리는 자료다.

영화 <더 플랜> 스틸 이미지

<더 플랜>이 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았던 이유는 그 주장의 논리적 엄밀성이나 제시된 근거의 완벽한 타당성이 아니었다. 막연하게 의심하던 바를 누군가가 깔끔하게 설명해줄 때의 시원함, 내가 옳았다는 뿌듯함,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의 위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감정들에 앞서는 기저의 이유는 바로 불신이다. 제도권 언론은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진짜 지식과 진실은 언제나 숨겨져 있다는 믿음이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호프스태터는 미국 사회에 ‘지식인은 허세에 차 있고 대중을 기만하며 속물적이고, 나아가 비도덕적이고 위험하다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고정관념은 평범한 사람이 체득한 상식과 윤리가 전문가나 식자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더 우월하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반지성주의’ 전통의 토대이다. 50년 전 미국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나라 사회에도 쉽게 적용될 수 있는 지적이다. 여기에 소셜미디어를 통한 정보의 과잉과 확증편향의 심리가 더해지면 진리 판단의 주체는 ‘나’로 귀결된다.

반지성주의는 여러 모습으로 출현한다. 개표 조작은 물론 한국판 프리메이슨의 음모를 믿는 이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때의 국수주의적 지지자들, 자연치유 육아법을 맹신하는 ‘안아키’ 회원들, 심지어 박근혜씨를 부당한 정쟁의 희생자로 믿는 태극기 할아버지들도 같은 범주이다. 하지만 이들의 무모한 반지성주의를 마냥 비판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많은 기자들이, 학자가, 정치인과 법률가가, 그리고 의사가 전문성이 모자란 허세를 부려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몽하려 들기까지 했다. 구멍 숭숭 뚫린 부실한 엘리트주의였다.

위근우 작가에 따르면, 한 교수는 최근 2년 동안 209번에 걸쳐 언론에 ‘멘트 인용’이 되었다고 한다. 한 명의 ‘전문가’가 유재석과 걸그룹, 문단 내 성폭력, 혼술족, 밸런타인데이 선물, 정당 내 갈등과 탄핵, 페미니즘에 대해 ‘전문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언론은 안이하게 엘리트를 이용하고 엘리트는 사회적 권위를 등에 업고 기사에 몇 줄을 덧붙이는 역할을 한다. 반지성주의의 ‘씨앗’은 아닐지 몰라도 효능 높은 ‘비료’의 역할을 자임하는 격이다. 오보를 반복하는 언론이 독자를 훈계하거나, 전문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지식인이 대중을 교육하려 들 때, 혹은 부패한 검경이 시민을 선도하려 할 때 반지성주의는 강해지고 넓어진다. 언론을 포함한 ‘전문적 정보’를 불신하고 허술한 엘리트주의를 배격한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나 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 반지성주의하에서 개인적 판단은 사실적 근거보다는 정서적 근거에 의해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언론이 제대로 된 공론장을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정동(情動)작용’이 이성을 대체한다.

그렇다고 제도 언론과 ‘엘리트’ 전문가의 몰락을 시대적 흐름이라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인가? 기자는 모두 기레기, 교수는 모두 폴리페서, 검사는 모두 떡검, 의사는 모두 샤일록이라 배척하면 정동작용조차 사라진 단순무식만 남는다. 반지성주의가 강해지면 매카시즘을 만나고, 극단으로 치달으면 폴 포트의 킬링필드를 만나게 된다. 안경을 썼다거나 손이 부드럽다는, 혹은 영어를 안다는 이유로 의사와 교사들이 처형되었던 참혹한 역사이다.

내 차를 추월하면 난폭운전이라 욕하고 내 앞에서 더디게 가면 초보라며 툴툴댄다는 우스개가 있다. 요즘의 정치-언론 담론의 장이 비슷한 양상이다.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하거나 나보다 모르는 듯하면 무식한 기자나 전문가라 욕하고, 내가 모르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쓸데없이 잘난 척하는 엘리트주의자로 간주한다. 부실한 엘리트주의는 실속 있는 전문가주의로 바뀌어야 하듯, 무모한 반지성주의의 성원들은 편협한 정서적 지식에 대한 맹신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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