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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7일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5월 말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비핵화’이다. 핵심 의제가 비핵화라는 의미는 정상회담에서 다른 의제가 함께 다루어지더라도 비핵화 의제가 깨지면 다른 의제도 진전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비핵화와 북한이 생각하는 비핵화가 일치하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지만 이 문제는 앞으로 협상을 통하여 합의를 이루어내야 한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한 가지 비교적 분명해진 것은 북한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방식’이다. 북·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밝힌 비핵화의 방식에 대하여 중국의 신화통신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이 선의로 우리의 노력에 응해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위한 단계적, 동보적 조치에 나선다면 한반도 비핵화가 해결될 것이다.”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밝힌 방안이니 가볍게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이 발언 이후 주목을 받게 된 개념이 바로 “단계적” “동보적(동시적)”이라는 개념이다. 북·미  간에 비핵화 문제를 단숨에 일괄타결할 것으로 기대를 모아왔던 만큼 이 시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왜 단계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과거 6자회담을 통하여 북핵 문제를 풀고자 했을 때 도입한 방식이 단계적, 동시적 방안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과거의 패턴을 답습하고, 또 북한에 핵개발의 시간만 벌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각에서 생겨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북한이 왜 단계적, 동시적이라는 방식을 강조하는 것인지에 대해 이론적 점검을 하고, 과거의 패턴이 반복되지 않게 어떤 해법을 제시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실무를 담당하지 않는 학자의 입장에서는 왜 단계적, 동시적이라는 개념이 중요한지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제공하면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상호 신뢰가 전혀 없는 두 조폭이 만나서 마약을 사고파는 거래를 한다고 가정을 해 보자. 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다. 이때 두 조폭은 모두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마약의 품질을 검증하고 가격을 흥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상대방이 물건과 돈을 제대로 가져왔는지를 확인하는 단계, 실제로 교환하는 단계, 그리고 거래가 이루어진 후 안전하게 현장을 떠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단계 등을 거치게 된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상호 신뢰가 존재하지 않을 때의 거래는 서로 사기를 당할 것을 우려해 상대방의 진정성과 실천을 확인하는 단계를 거치게 되고, 실제의 거래는 외상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하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동시적 거래를 해야 돈이 떼이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와 같은 아주 신뢰할 만한 제3자가 중재를 하게 되면 신용카드 거래도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단계적, 동시적 주고받기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 미국과 북한의 관계는 적대관계가 청산되지 않은 불신의 관계이고, 북한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핵무기를 미국과 거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만약 북한이 단숨에 핵무기를 다 주어버리고,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받아야 할 평화적 조치를 당장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받겠다고 결정하면, 북한만 무장해제가 된 상태에서 혹여 미국이 딴마음을 먹을 때, 북한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위의 비유와 같이 단계적, 동시적으로 비핵화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미국이나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단계를 거치는 기간 동안 북한이 딴짓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또 다른 불신이 존재한다. 과거의 단계적 비핵화 과정이 틀어진 매우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러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방안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신뢰 부재의 상태에서는 이론적으로 단계와 동시성을 피할 수는 없다. 지난번 기고에서 필자가 제안한 북·미 군사동맹이 단계와 동시성을 빨리 뛰어넘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었지만, 북·중 정상회담으로 인하여 이 카드의 가치는 현저히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거의 유일한 방법은 미국과 북한의 최고 정상이 비핵화와 북한의 안전보장을 교환할 것을 선언하고, 실무진이 정상의 축복하에 비핵화의 단계를 최대한 빨리 진행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지는 신만이 알겠지만, 북한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중국이라는 보호막을 만들어 놓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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