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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정호승 시, ‘산산조각’ 중에서).

‘미투’(#MeToo)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4년 어느 서울대 교수에 대한 조교의 고발이 성희롱을 공론의 의제이자 사법 사안으로 만든 후, 권력관계 내 성폭력에 대한 고발과 성토, 개선책 요구가 지속됐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직종의 여성들이, 각급 학교의 여학생들이, 다양한 방식의 성폭력에 노출되는 사건들이 반복되었고 폭로도 계속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016년 봇물처럼 쏟아졌던 문단, 영화계, 예술계의 성폭력 폭로에 어떤 실효가 있었는지 의심하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폭로는 제도권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접근이자 최후의 수단으로 끈질기게 이어져왔다. 결국 꿈쩍 않던 문화권력의 철옹성들이 썩어빠진 성폭력적 실체를 드러냈다. 참담한 현실이다. 여성혐오를 미화하고 권력지향을 은폐해 온 그들의 예술가적 특권의식, 산산조각이 났으면 좋겠다.

성추행을 남성예술가의 기벽, 거창한 고뇌의 부작용 정도로 여기는 관행도 뿌리 뽑아야 한다.

고은의 시를 교과서에서 빼는 대신, 문화예술계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이들의 ‘성취’를 평가하는 데 사용된 미학적 기준과 비평의 관점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와 예술가 개인의 삶은 별개로 볼 수 없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고 착취하면서 이룬 ‘성취’를 그 행위와 별개의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하는 잣대는 이미 윤리적, 정치적으로 비뚤어지고 오염된 것이다. 문제는 커진다. 편향되고 오염된 잣대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은의 시, 이윤택의 극을 ‘좋아하도록’, 거기서 모종의 ‘가치’를 읽어내도록 훈련된 우리 자신의 시각과 사고방식 역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 동료의 말에 절망감을 느꼈다. 한 사람의 인격, 인권을 온전히 철저히 존중해야 한다는 일상의 사실을 간과한다면, 문학도 예술도 혁명도 다 무의미하다. 여성을 소비하는 남성중심적 예술관, 윤리적 실패를 내포하는 가치를 이상화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의 향유를 통해서 여성혐오에 공모하도록 만드는 미적 가치기준, 산산조각이 났으면 좋겠다.

극단을 해체하고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자숙을 약속하고 일부는 침묵한다. 하지만 성폭행은 물론 희롱이든 추행이든 성폭력은 범죄다. 수사기관의 공식적 개입을 통한 조사, 문책, 처벌이 필요한 것이다. 속죄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말로 눙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법이 명시하는 절차대로 수사에 성실히 임하고 저지른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이윤택이 사과성명을 시 쓰듯 작성해서 연극처럼 리허설하고 연기했다는 보도는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다. 성범죄 가해자들의 ‘사과’가 어쩌면 가질 수도 있었을 진정성을 부정하며 그는 가해자에게도 죄의식, 자기혐오가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마저 조롱한 셈이다. 다른 범죄들과 달리 성폭력이 사과로 해결된다는 생각,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범죄가 아니라는 인식, 산산조각이 났으면 좋겠다.

이처럼 계속되는 고발과 증언에는 1월 말 서지현 검사가 검찰조직의 여성혐오적 문화와 성추행, 성폭력의 관행을 폭로하고 피해자의 잘못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서 검사가 당한 추행이 은밀한 것이 아니라 법무부 장관을 포함한 검찰 인사 다수가 있는 장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다는 점, 수차례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법무부 내에서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충격적이었다.

서 검사의 폭로가 이전 다른 여성들의 외침보다 더 주목받은 이유는, 상대적으로 권력과 지위를 가진 여성들조차 여성혐오의 폭력적 행태로부터 안전하지 않음을, 또 그러한 폭력적 행태를 단죄하는 법적 임무를 부여받은 남성들 사이에서조차 사실은 여성혐오적 성범죄가 일상화되어 있음을 밝혔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혐오적 남성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그들의 탈법적 특권의식, 산산조각이 났으면 좋겠다.

그 후 검찰조직 내부의 성폭력적 문화에 대한 비판과 처벌, 정화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 문제에 공식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팀들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법에 따라 범죄를 가리고 처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이 성폭력을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 집단이었다면, 검찰조직의 자기정화라는 게 가능할까. 검찰이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의 법적 권위와 정당성에도 큰 흠결이 생긴다. 성범죄 일반에 대한 검찰의 적절한 수사와 기소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제도와 절차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산산조각이 났으면 좋겠다. 산산조각 부서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흩어져야 풀어내고 골라낼 수 있지 않을까. 아픔도 절망도 산산조각이 났으면 좋겠다. 깨지지 않으면 새로워질 수 없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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