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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미국 노동운동의 지도자이자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유진 뎁스는 미국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설령 그럴 능력이 있더라도 여러분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그곳으로 이끌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는 여러분을 그곳에서 끌고 나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뎁스가 살아서 촛불집회를 본다면 자신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느낄 법도 하다. 그만큼 시민들은 특정한 정치 지도자나 정당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강력한 정국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하게 했다. 아직 확고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상황도 극히 유동적이지만, 주권자가 직접 나서서 기성 정치권이 나라의 새 기틀을 세우도록 강제하고 있는 현실을 혁명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혁명이라 부르는 사건은 4·19혁명뿐이다. 물론 이 용어에 부정적인 이들도 아직 많고, 현행 헌법 전문도 ‘4·19 민주이념’이라는 표현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4·19는 결코 ‘의거’나 ‘봉기’에 머물지 않은 위대한 ‘미완의 혁명’이며, 1980년 5월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경험을 거치며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다. 학자들은 뚜렷한 이념, 조직된 주체, 폭력적 권력 교체 등의 기준에 비춰 촛불집회에 혁명의 개념 적용을 꺼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론은 현실을 뒤따라오는 법이다. 이화여대생의 끈질긴 농성 투쟁이 운동권의 관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음을 되돌아보라. 머지않을 미래에 정치적 변화가 고비를 넘는 순간, 이 땅이 새로운 정치이론의 탄생지가 될 수도 있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은 4월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4·19가 터진 다음달에 그는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기도’) 우리의 혁명을 끝까지 이룩하자고 노래했다. 그처럼 소박한 성취라면 그저 자연발생적인 봉기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4월의 혁명성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동시에, 민중 역량의 취약함과 혁명을 훼방 놓을 세력의 건재함을 직시했다. 그런 복합적 인식 위에서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육법전서와 혁명’)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헌법재판소가 결정을 내리면 이후 60일 안에 치러질 대선에서 새 대통령이 당선과 동시에 취임한다. 숨 가쁜 정치 일정 속에 시민혁명의 방향타를 주권자로부터 가로채려는 술수와 공작이 더 거세질 것이며, 야당들의 동요와 과욕이 부른 실책도 이어질 것이다. 그런 방해물들에 역사의 물길이 막히지 않도록 시민들은 대선 이전에라도 결선투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를 바꾸고 검찰, 언론, 재벌 개혁을 서두르라고 외치는 중이다. 또한 권력 분점에 눈이 먼 졸속 개헌이 아닌 긴 안목의 차분한 개헌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정치권이 민심에 충실한지를 가늠할 시금석 하나는 김수영의 깊은 인식과 한 몸인 살아 있는 언어 감각을 보여주느냐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의 헌정파괴에는 명백히 사법적 처벌 대상인 ‘공범’이 많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공범에 준하는 자들을 ‘부역자’라고 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한국전쟁기의 참혹한 대립을 떠올리게 하는 이 단어는 우리 편이 아니면 곧 적이요, 적은 처단 대상일 뿐이라는 흑백논리에 오염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어느 대선주자가 말한 ‘국가 대청소’는 성급한 어휘 선택이며, 촛불집회의 자유발언에서 시민들이 거듭 강조한 ‘우리 안의 최순실’에 대한 성찰과 동떨어진 느낌이 짙다. 퇴행을 거듭해온 우리 사회를 갱신하려면 단지 선명한 구호가 아닌 자기갱신의 비전을 담은 창조적 언어, 혁명의 언어가 필요하다.

급박한 변혁의 시기는 언어를 둘러싼 싸움의 나날이기도 하다. 농단, 탄핵, 인용 등 어려운 한자어가 빈번하게 쓰이는 시국에 ‘키친 캐비닛’ 같은 낯선 외국어가 오용되기도 한다. 세월호 희생자 중 아직 돌아오지 못한 학생의 어머니들이 9명의 실종자를 ‘미수습자’로 바꿔 부르게 한 사연을 정치권은 깊이 되새겨야 한다. 광장 안팎을 가득 메우는 자신의 실천이 혁명인지 아닌지에 별로 관심이 없는 촛불시민의 당당한 자세야말로 새로운 언어와 정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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