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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소득주도성장이란 단어에 본능적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수 가치와 상극에 있는 소득재분배 정책으로 보수의 성배인 경제성장을 달성한다고 하니. 게다가 성장이 형평한 소득분배를 가져온다고 그렇게 외쳤었는데 거꾸로 형평이 성장을 촉진시킨다고 하다니. 신성모독에 인과전도까지 가세한 꼴이다. 그래서 보수는 소득재분배가 성장 정책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은 정통 경제학에는 족보도 없는 황당한 좌파 이론이라는 일부 학계와 언론의 주장에 쉽게 현혹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사실 그동안 주류경제학에서 고소득층에서 저소득층으로의 소득재분배는 시장의 효율성과 경제성장을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도덕적 가치라는 인식이 대세였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와 이런 인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 한 축은 소위 ‘포용적 성장론’의 등장이다. 당대 최고의 성장이론가라 할 수 있는 아세모글루는 경제 자원이 소수의 권력층에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를 구축해야 국민의 인적자본과 창의력이 최대로 활용되어 높은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론을 세웠다. 또한 형평한 소득분배와 보건과 교육에 대한 공공지출 확대가 성장친화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실증 연구가 연이어 발표되었고, IMF와 OECD 같은 권위 있는 국제기구가 이러한 연구를 수용함으로써 포용적 성장론은 주류에 편입되었다.

변화의 다른 축은 ‘장기침체론’의 대두다. 크루그먼, 서머스, 스티글리츠와 같은 노벨상급 경제학자들은 소비와 투자 수요의 부족은 일시적 불황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오래된 케인지언 이론을 부활시켰다. 이들은 수요 부족이 많은 선진국에서 지속적 저성장의 배경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원인의 하나로서 소득양극화를 지목했다. 소득이 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층에서 소비성향이 낮은 고소득층으로 이동함으로써 만성 소비 부족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속적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필자는 이러한 경제학자들의 시각이 한국 경제에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혁신이 성장의 엔진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도하게 기울어진 소득분배는 트랜스미션의 성능을 저하시킨다. 자동차의 출력이 엔진의 마력에만 달려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다. 문제는 ‘형평한 소득분배를 어떻게 달성하는가’이다.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최저임금 상승을 통하여 저소득층의 소득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를 재원으로 저소득층의 임금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근로장려세제가 대표적 예다. 셋째는 역시 증세를 재원으로 하여 성장친화적이라 판단되는 보건과 교육 등에 대한 공공지출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바로 포용적 성장론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정책이다.

필자는 정부가 선택한 첫째 정책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기업양극화가 온갖 사회문제의 뿌리가 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정책이 성공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임금 상승을 감당하는 기업주가 양보할 잉여가 있어야 노동수요 감소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한 받는 노동자의 소비성향이 주는 기업주의 소비성향보다 크게 높아야 총소비가 늘어난다. 최저임금 상승의 대부분을 감당해야 하는 소상공인은 나누어 줄 잉여도 부족하고 지출성향도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저임금 상승이 물가상승을 유발하여 임금 상승을 상층부로 확산하고 가계의 부채부담도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도 허망하다. 소상공인들은 임금을 가격에 전가할 시장지배력도 없어 보인다. 오래 기다려도 최저임금 상승 정책이 좋은 결과를 낼 가능성은 희박하다.

반면 다른 정책에는 노동수요 감소라는 부작용이 없다. 임금보조금은 노동공급을 증가시켜 고용을 높일 수 있고, 보건과 교육에 대한 공공지출 증가는 직접적으로 고용을 창출한다. 문제는 재원이다. 야당의 협조가 필요하다. 보수는 처음부터 소득주도성장을 최저임금 상승으로 좁게 정의하고 사냥꾼처럼 최저임금 상승의 부작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득주도성장 정책가들은 최저임금 상승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제 불행하게도 소득재분배 정책이 통째로 코너에 몰려 있다. 다행히 상당수의 보수가 근로장려세제 강화와 포용적 성장에는 우호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세금 좀 올리려 하면 국제 추세에 역행한다고 하고, 공공지출 좀 늘리려 하면 그리스 꼴 난다고 하던 사람들이 많아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의 입장은 정부가 현실적인 성장친화적 소득재분배 정책을 강화해나갈 발판이 될 수 있다. 그 정책을 뭐라고 부르든 말이다.

<송의영 |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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