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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정동칼럼]성장 논쟁

opinionX 2017. 11. 10. 13:56

요새 성장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이 됐는데, 새 정부의 경제철학이 무엇인지 아직 확실치 않다. 출범 초기에는 대통령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하고 일자리를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고 했다. 일자리는 대통령이 직접 챙길 만큼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을 숫자로 접근하면 자칫 보여주기식으로 끝날 위험이 있다. 일자리는 경제정책의 종합적 결과다. 비유하자면 일자리는 마차이지 말이 아니다. 마차를 말 앞에 둘 수는 없다.

그 다음 단계에서 새 정부가 강조한 것은 소득주도성장이었다. 수년 전부터 세계노동기구(ILO)에서는 임금주도성장을 강조해왔다. 노동자들의, 특히 저임금노동자들의 임금을 높여주는 것은 시장에서 생산물에 대한 구매력을 높이므로 이것은 수요 증가를 통해 다시 소득 증가를 가져오는 경제의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논리다. 공급보다는 수요 측면에 착안하고 있으므로 케인스주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론의 역사를 보면 한때 수출주도성장이 있었고, 그 뒤 부채주도성장이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제시된 성장론이 임금주도성장이다. 한때 수출을 ‘성장의 엔진’이라고 불렀는데, 임금을 성장의 엔진이라고 보는 점에서 새로운 관점이다. 새 이론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논쟁이 벌어졌지만 지금처럼 오래가는 세계적 불황과 세계적 소득 양극화의 현실에서는 상당히 일리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불황 속에서 나홀로 수출 강행은 어렵고, 가계부채가 한계를 넘은 지금 부채주도성장은 위험하다.

한국에서는 임금주도성장이 소득주도성장으로 확대됐다. 임금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보다 자영업자들이 훨씬 많으므로 자영업 소득도 포함하고, 열악한 처지의 중소기업의 소득도 포함하여 소득주도성장으로 확대된 것이다. 임금주도성장의 논리에 바탕을 두면서 한국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 소득주도성장이다. 경제학계에서 소득주도성장 연구를 주도해온 홍장표 교수가 대통령 경제수석으로 임명되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홍 수석은 보수언론의 표적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보수언론은 귀에 익은 성장론이 아닌 소득주도성장이 못내 불편하고 불안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는 부쩍 혁신성장 이야기가 많다. 우리나라 경제학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적 경제학자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게 혁신성장이고, 보수적 정치인들도 당연히 혁신성장을 좋아한다. 성장을 위해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고, 어떻게 보면 혁신성장이라는 것은 동어반복에 가깝다. 지금 보수파들이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소득주도성장을 의심하면서 혁신성장을 앞세우는 것은 오래전 분배냐 성장이냐 하며 끊임없이 노무현 정부를 압박하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지금은 분배가 잘돼야 성장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세계은행, IMF, OECD가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세계 대세가 아닌가.

혁신 좋은 줄 누구나 안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왜 혁신이 잘 안되느냐, 어떻게 하면 혁신이 되나, 하는 것이다. 구소련에서는 기업이 기술혁신을 하면 당장은 포상을 받지만 그다음 해부터 생산목표가 올라가기 때문에 길게 보면 혁신 인센티브가 없었다. 그래서 소련의 기술혁신이 지체됐고 결국 사회주의 붕괴의 중요 원인이 됐다.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를 썼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인도 대사로 임명받아 근무한 뒤 인도 농촌의 빈곤에 관한 책을 썼다. 당시 인도 농민들은 답답하게도 기술혁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산성이 낮은 전통기술을 고수하고 있었다. 갤브레이스의 분석에 의하면 그 이유는 이렇다. 현재는 농민들이 전통적 기술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데 만약 기술혁신을 시도할 경우 잘되면 다행이지만 자칫 실패하는 날에는 가족의 생계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기술혁신은 항상 실패 가능성이 높은 모험이고, 이것이 가능하려면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돼야 한다. 북유럽 복지국가가 혁신을 잘하는 이유는 두꺼운 사회안전망 덕분이다. 한국에서 성장을 위해 혁신이 필수 불가결인데, 이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과 인센티브 체제가 갖춰져 있지 않다. 생존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이 어렵사리 기술혁신을 하면 재벌이 가로채 간다. 한국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심각한 갑을 관계 속에는 소련과 인도의 문제가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의 개혁 없이는 혁신성장이 불가능하다. 혁신성장, 물론 좋고 필요하다. 관건은 이를 위한 경제개혁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장 논쟁이 아니고 과감한 경제개혁이다. 새 정부 출범 반년이 되도록 개혁 이야기가 안 들리는 것은 걱정스럽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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