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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 연재한 <혐오를 넘어> 시리즈를 보면, 학교에서 요즘 가장 ‘핫하다’는 욕은 엄마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이런 혐오표현에 거부감을 느낀다. 자칫 반대했다가 ‘왕따’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주저한다. 세상의 잘못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처음에는 묵인하고, 방관하다 대세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학교는 타인에 대한 혐오를 몸에 익히는 학습장으로 전락한다.
아이의 세계는 세상의 축소판일 뿐이다. 인터넷 방송 역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나르며 혐오를 확산시키고, 온라인 스포츠 중계에는 욕설과 비아냥 댓글이 달린다. 정치인들은 혐오의 확성기로 활약하고 있다. 종교 역시 혐오의 주요 생산자다.
일러스트_김번 (출처:경향신문DB)
혐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서열화에서 싹을 틔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타인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정상은 다수, 비정상은 소수일 뿐이다. 동성애는 동물의 세계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다. 한데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은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장애인, 외모가 남다른 사람도 비정상이란 딱지가 붙는다. 성적지향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사랑이나 관용의 대상이 아닌 개조나 배척의 대상으로 본다.
혐오의 제물은 소수자나 약자이기 마련인데, 누구나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글로벌 사회에서는 국내에서 명문대를 졸업한 부유층 청년들도 소수자다.
어빙 고프먼은 <스티그마>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한 남성은 오직 한 부류밖에 없다고 했다. ‘젊은 기혼의 백인으로 도시에 살고 북부 출신이면서 이성애의 성향을 가진 신교도 아버지로서, 대학교육을 받고 완전 고용되어 있으며 좋은 피부와 몸무게, 키, 그리고 최근의 운동경기에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 하지만 어떤 사람도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유지하기 어렵다.
서열화는 상대를 동료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지 않는 태도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과 생태계의 종으로서의 ‘인간’을 구분했는데,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라고 했다. 사람이 되려면 사회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혐오는 자리를 내주기는커녕 자리 자체를 뺏는 태도다. 그래서 혐오는 사람됨에 대한 공격이며, 피해자 한 명에게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 친구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고통을 준다. 사람 사는 세상은 서로 연결돼 있으며, 우리는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범죄자를 처벌할 때도 ‘혐오적 처벌’을 피하고 있다. 소설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붉은 글씨를 새겨 망신을 주는 식의 징벌은 현대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죄에 대한 상응한 처벌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알코올중독자라고 고백한 세계적인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음주운전자의 차량에 표지를 한다면 함께 차를 쓰는 ‘아버지, 동생, 나도 열등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각인될 수 있다’며 혐오적 처벌을 반대했다.
한나 아렌트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선생님이 만약 반유대인 발언을 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와라.” 어머니의 말대로 아렌트는 유대인 혐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을 가르치던 교사와 충돌했고, 수업 거부를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아렌트는 미국에 정착한 후 평생 인간과 세계성을 고민했다.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같은 명저에는 아렌트의 인간에 대한 성찰과 사유가 담겨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토대 위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으로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과정과 체제, 태도라고 보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있다가 붙잡힌 홀로코스트의 책임자 아이히만의 재판 참관기이다. 아렌트가본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한 인간’이었다. 아이히만과 그의 변호인은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를 명령에 따라 충실하게 했을 뿐이라고 했다. 아렌트가 이 책에서 비판하는 것은 사유하지 못하니 말하지 못하고, 그래서 거부하고 저항하지 못한 무능이었다. 그게 책의 말미에 딱 한 번 나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혐오사회를 넘어서려면, 아렌트의 말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반대해야 한다.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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