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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작가 중 한 사람인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2013)를 연전에 읽고 기분 좋게 놀랐다. 과문한 탓인지 이 같은 서사를 그전에는 본 적 없었다. ‘쇼코’는 주인공 ‘나’의 일본인 친구다. 소설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새로운 우정과 교호와 교감에 관한,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 주체인 ‘공(共) 성장’의 서사다.
섬세하기로 유명한 이 작가의 데뷔작은 나에게는 21세기 이래의 새로운 한·일 우호를 함축하는 서사로 읽혔다. 도쿄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나의 친구는 최은영 작가를 일본 학생들이 듣는 자신의 한국문학 수업에 초대하기도 했다.
2016년 12월31일 세밑 부산에서 열린 촛불시위는 ‘평화의 소녀상’을 일본 영사관 앞에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날 여성, 학생, 민주노총과 시민단체 회원 등 약 5만명의 부산 ‘촛불’이 모였는데, 그 슬로건은 지금도 음미할 만한 것이다. 시민들은 헌법재판소의 신속한 탄핵심판과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 퇴진, 그리고 12·28 한·일 합의 폐기를 요구했다. 박근혜+아베의 ‘불가역적’ ‘위안부’ 문제 해결과 10억원의 ‘지원금’은 할머니들의 소망도, 시민들의 뜻도 아니었다. 그렇게 촛불은 ‘평화’와 끝나지 않은 탈식민의 과제도 제기하고 있었다.
‘쇼코’의 친구이며 일본여행을 좋아하는 한국인들과 촛불을 들었던 보통의 한국인들은 물론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심으로 평화를 옹호하며, 제국의 폭력에 고통당했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진심으로 존중받기를 원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현재 아베 신조는 그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다. 현해탄의 평화와 사람 사이의 정을 공격하고 있다.
오늘날 민족주의는 쉽게 위험하고 낡은 것으로 간주된다. 반일 민족주의 또한 심각한 혐의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실제로 여성과 소수자를 억압하거나 엄연한 다른 모순(계급·지역·젠더 등)을 덮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동원되기도 했다. 이승만도 심지어 이명박도 반일 민족주의의 대중성을 이용하려 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이후엔 탈민족주의가 지식계와 담론장의 상식처럼 되기도 했다.
과연 종래의 민족주의는 오늘날 한국이 구가하는 글로벌리즘(한류, BTS, 200만명의 이주자, 글로벌기업 등으로 상징된다)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제 한국은 그런 민족주의와는 시쳇말로 ‘사이즈’ 자체가 안 맞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민족주의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계속 입고 있다. 첫째는 외적 현실 때문이다. 미국의 여전한 패권과 제국적 횡포, 중국의 가공할 굴기와 그 부산물들. 초강대국이 그물 쳐 놓은 지정학적 매트릭스 속에 여전히 한반도는 갇혀있다. 비극적이고 소모적인 분단의 현실 또한 ‘민족’을 해산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일본의 군사력과 우경화가 한국 민족주의를 주삿바늘이 되어 자극한다.
둘째는 한국 내부의 문제다. 국가폭력 가해자, 친일파, 극우 종교세력, 매판자본과 일부 지식분자들은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한국을 지배해왔다. 그 (무)의식의 매개가 식민주의다. 이는 물론 자유한국당이나 조선일보 등속의 정신상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며, ‘현실’의 힘으로 움직인다.
민족과 민족주의는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가치다. 민족주의는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탈식민주의와 교집합이 있다. 입맛대로 이상적이고 투명한 것만을 골라 취하기란 불가능하다. 초정세적이고 ‘보편타당’한 ‘탈민족’의 논리란 책상 앞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한국 지식계는 미국이나 일본을 경유하여 수용된 종래의 탈식민주의·탈민족주의를 갱신하고 새로운 공동체와 세계시민적 규범을 논해야 하는 과제가 있는데, 그 언어와 앎은 잘 개척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기득권자나 지식인들은 시민대중의 반일 행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쉽게 비웃는다. 대중을 일차원적 민족주의자들이거나 배타주의자라 치부하는 것은, 다양한 ‘쇼코’의 친구들인 오늘날 한국 시민의 글로벌한 삶의 실상에도, 동아시아의 현실에도 맞지 않는 오만이다.
한국과 일본의 ‘글로벌한 분업체제’와 인적·문화적 교류 등을 통해 얽힌 다양하고도 넓은 선린관계를 생각할 때, 아베 신조의 도발은 실로 졸렬하고 무례한 것이다. 아베는, 일면 낡아가고 일면 갱신돼가던 한국 민족주의의 날과 시민대중 마음의 역린을 건드렸다. 연일 분석가들이 그 단기·장기적 의도를 말해주는 것처럼, 빤히 보이는 책략에 말려들지 않게 단호하고도 냉정하게 대처해야겠다.
식민주의에 맞서는 전선은 내외에 걸친다. 오늘의 이 대립은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가상적 ‘한·일 대결’이 아니라, 현실의 식민주의 대 민주공화국 시민 간의 대결처럼 보인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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