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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천동설이 주장했던 태양계 행성들의 궤도에 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다가 어떤 글을 발견했다. 그 글은 아직도 천동설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지구평평설의 어리석음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천동설과 지구평평설을 모두 믿었더라면 차라리 일관성이 있다고 느꼈을 텐데, 하나만 믿으면서 다른 하나에 대해 통탄하는 것이 무척 기이해 보였다.

“어떤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 주장을 넘어서 증명된 것으로 보는가” 하는 점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그 사회의 중요한 지적, 문화적 지표다. 개인의 경우에도 그렇다. “무엇을 증명된 것으로 보고, 무엇을 아직 의심하는가”는 어떤 개인의 판단력, 성숙함, 기질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징후다. 나는 어떤 사람의 ‘증명에 대한 감각’이 이례적이면 다른 자질이 훌륭해도 높게 평가하기가 망설여진다. 온갖 정보가 쓰나미처럼 우리의 전두엽으로 몰려오는 이 시대에는 어떤 정보가 ‘증명된 사실’인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며, 나름의 ‘증명에 대한 태도와 감각’으로 잘 여과하지 않으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온갖 학문과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고 있지만, 무엇이 증명된 것으로서 믿을 만한 사실인지 가리는 것은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정보의 폭발이라고 할 만큼 많은 정보가 유통되지만, 정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려는 소음이 심각하고, 정보의 신뢰성에 대한 국가, 지식인 사회, 매체의 권위가 붕괴됨으로써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시대가 된 것이다. 즉 경제적 의미와 다른 의미에서 정보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 나라에서 각 정당과 그 열성지지자들의 당파적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부의 말도 신뢰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엄청난 소문이 용두사미로 끝난 경우는 얼마나 허다한가. 소셜미디어에 떠도는 어떤 상품에 대한 칭찬이 기업의 은밀한 마케팅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정치적 함의가 있는 보도 중에서 매체의 정치적 포지셔닝을 고려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기사는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거대한 정보의 태평양에 뗏목을 타고 표류하면서, 소금물이 아닌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하지 못해 탈수증에 시달리고 있다. 

전복적 사고의 총아인 철학자 니체는 “진리란 그것 없이는 특정한 종의 살아 있는 존재들이 더 이상 살지 못할, 그런 오류의 한 양식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알쏭달쏭한 그의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어차피 객관적 진리라는 것은 없으며, 삶에 대한 유용성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비록 그의 말이 영감을 주기는 하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런데 사회에 만연한 진실과 증명에 대한 무감각, 증명 따위는 개에게나 요구하라는 식의 세태를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니체의 수제자가 된 것 같다.

학문을 제외했을 때, 증명이 가장 첨예하게 문제되는 영역은 사법과 언론이다. 사법에는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 발전하고 제도화된 ‘증명의 원칙’들이 있다. 주장과 입증을 엄격히 구별하고, 오염의 가능성이 있는 증거는 배제하며, 편파적일 가능성이 있는 판사는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 증거가 채택되는 체계적인 절차가 있고, 신빙성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관한 여러 원리가 확립되어 있다. 일의 특성상 다른 어느 분야보다 증명의 원리가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도 인간의 일인지라 판사의 자유로운 심증과 양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회색지대가 있다. 그 부분이 지혜롭게 운용되었으면 국민의 신뢰를 더 얻었겠지만, 잘못을 저지른 판사들이 있었고, 게다가 정치와 계층이 양극화된 시기에는 안간힘을 다해도 결코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언론은 좁게 말하면 ‘팩트체크’라고도 말할 수 있는 증명의 문제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매체마다의 정치적 지향, 극심한 보도경쟁, 매체의 난립, 시간의 압박 따위가 증명의 원칙을 통과하지 못한 글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증명의 엄격성’이라는 사회의 무형적 자산을 가장 위태롭게 하는 분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회에 대해 가장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할 정치사회의 증명에 대한 무책임과 허언증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증명에 대한 감각과 태도는 개인과 사회의 발전 단계와 건강성에 대한 핵심 지표다. 개인이 그리고 사회가 증명의 원리를 엄격하고 뚜렷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과 가치, 주장과 증명을 변별해야 한다. 자신이 처한 입장이 자신도 모르는 새, 더러는 느슨하게 더러는 과도하게 증명을 요구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개인 또는 공동체의 정신의학적 문제가 진실의 수용을 방해하고 망상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자각해야 한다. 

한국은 양적 지표가 보여주듯이 놀라운 성취를 이룬 나라다. 구성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즐거워해도 된다. 그러나 그런 지표와 별개로 심각한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위기의 신호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잘못된 구조를 개선하고, 미래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때 가장 긴요한 것이 ‘증명에 대한 감각과 태도’다. 우리는 이에 관한 한 미성숙한 젊은이가 겪는 불안정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아직도 거치고 있다. 

개인이 증명에 대한 통찰이 부족해 진실을 제대로 못 가린다면 앞날을 위해 필요한 행동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공동체가 현실에 대해 엄밀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제대로 된 논의를 시작하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과도하고 피로한 당파성을 극복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과 세력이 끊임없이 퍼뜨리는 소음을 최대한 걸러내며, 엄격한 증명을 바탕으로 환상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절실하다.

<조광희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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