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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직접 알지 못한다. 행사나 집회에서 스쳐 지나가며 눈인사나 나누었던 사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애도할 수도 없다. 자꾸만 그가 출연한 토론 프로그램 영상을 돌려보고, 어록을 찾아보고, 집회와 시위 기록들을 뒤지고, 그의 페이스북을 들여다본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애끊는 추도사를 몇 번이고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럴진대 그와 평생을 동고동락했던 분들의 심정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너무도 황망하여 실감조차 나지 않는 그의 부재. 부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존재의 상실이며 사라진 존재를 만지는 예리한 감각이다. 우리는 모두 그가 강렬히 존재했음을 느끼는 사후적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비로소 그의 삶을 돌아본다. 언론과 시민단체가 여러 각도로 조명한다. 진보정치의 큰 별, 거악에 맞섰던 소신 있는 정치인, 사회적 약자와 서민을 위한 정치인, 유일하게 유머를 아는 진보 정치인, 촌철살인의 달변가….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나에게 그는 “나라다운 나라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성평등한 나라”라고 말했던 유일한 진보 남성 정치인이었다. 여성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이라며, 성평등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공동과제”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남성 정치인이었다. 정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기획에 여성이 배제되는 현실과 젠더가 결여된 ‘진보적’ 가치에 깊은 회의감과 절망감이 팽배한 가운데에서도, 노동운동가 출신 남성도 여성운동의 진정한 동지가 될 수 있음을, 이성애 남성도 성소수자들과 연대할 수 있음을, 생물학적 남성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각종 행사와 모임, 토론회나 미디어에서뿐 아니라, 열정적 입법 활동과 다양한 투쟁현장에 함께함으로써, 여러 여성단체들의 오랜 후원회원으로서 말을 행동으로, 소신을 실천으로 일구며 그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초선 의원이던 2004년, “호주에도 없는 호주제를 없애자”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며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 대표 발의, 2006년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대한 특별법안’ 대표 발의, 2008년 국회의원 중 처음으로 차별금지법 대표 발의 등은 그가 펼쳐온 의정활동의 아주 작은 예들이다. 더 중요한 건, 법제도의 제·개정만으로는 사회문화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틈만 나면 뿌리 깊은 성차별 구조의 문제를 강조하곤 했다는 점이다. 호주제 폐지 당시에는 “법적 폐지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잔재를 문화적으로도 청산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일갈했고, 저출산의 원인은 아이를 안 낳는 여성이 아니라, 여성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없는 사회문화적 환경에 있음을 오래전부터 지적했다. “우리나라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두 종류의 국민이 있는 셈이다. 사회·정치적으로 강자인 남성이 봉건문화, 유교문화, 가부장적 질서 등 힘과 폭력에 의해 차별과 억압구조를 만들어 간다”고 한 건 2005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다.

“여성비정규직, 삼중의 ‘을’ 아닙니까. 여성이어서, 비정규직이어서, 주로 영세기업에 다니는 열악한 위치로 삼중의 을입니다”(2013년, 여성노동문화제 토크콘서트 패널 출연 당시)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 그는 누구보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다. 2005년부터 매년 3·8세계여성의날에 여성들에게 장미꽃을 선물해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1979년 YH사건으로 사망한 김경숙 열사의 투쟁을 기념해 제정된 ‘여성노동운동상’ 후원금을 가장 먼저 쾌척한 정치인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가 오랫동안 함께한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 승리 환영논평을 결국 발표하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는 점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 그는 우리가 애써 생각해야만 생각할 수 있는 것,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공기 같은 특권들을 일깨우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수자와 약자 모두의 행복을 바라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가 살아낼 수 없는 사회의 깊은 내면과 다시 직면하게 된다. 누군가의 사회적·실존적 죽음을 전제로 굴러가는 불평등한 세상, 누군가의 삶만을 위해 존재하는 부조리한 구조. 지난 6월, 한국여성의전화 창립 35주년 후원의 밤에서 그가 한 말처럼, “야만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할 책무는 이제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았다.

그의 미소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비로소 나는 그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영면하소서, 노회찬 의원님.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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