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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 등 국제노동기구(ILO)의 핵심협약을 정부가 비준할 의사가 있다는 보도를 봤다. 크게 환영할 일이다. 새해 선물 같아 기뻤지만 유엔의 또 다른 권고가 떠올라 가슴 한편이 묵직해졌다.

지난해 10월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대해 무더기 권고를 하면서 세 가지 핵심 사안을 특별히 콕 집었다. ‘한국기업의 인권 침해 대응’ ‘모든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 전면보장’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이에 대해 18개월 이내에 이행여부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10년이 넘은 묵은 과제다. 참여정부의 국정과제로 2007년 법무부가 입법예고까지 했다. 일부 종교 세력이 반대하는 바람에 성적지향, 학력, 출신국가 등 7가지 항목이 차별금지 사유에서 빠져 누더기 법안이 되었다가 결국은 폐기됐다. 이후 차별금지법 제정은 수차례 무산됐다.

‘무산’은 답보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동안 차별과 혐오가 확산되고 인권은 후퇴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인권의 시계는 거꾸로 돌았다. 지난 10년간 편견과 배제와 차별과 혐오가 자행되어도 모른 척하거나, 차별해도 된다는 혐오의 정치가 활개를 쳤다.

시민들의 숙의와 민주적 토론에 의해 만들어진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특정 집단의 노골적 방해로 정식 선포되지 못했다. 도미노처럼 여파는 지방으로 이어져 여러 지역의 인권조례가 잇달아 폐지됐다. 차별금지법·인권교육지원법 등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이 압박에 못 이겨 법안을 철회하는 일이 속출했다. 급기야 자유한국당의 김태흠 의원 등은 국가인권위법에 명시된 19개 차별금지사유 중 성적지향을 삭제하자는 법안까지 발의했고, 여성가족부는 ‘성평등’이란 단어를 포기하고 ‘양성평등’을 선택하는 또 다른 차별을 하고 말았다.

정부와 국회가 혐오세력에 굴복하면 그 결과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가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조롱과 굴욕을 견뎌야 하고, 존재 자체를 위협당한다. 증오범죄를 걱정하는 여성·장애인·성소수자의 비율이 80~90%가 넘는다는 인권위의 조사(2017)는 혐오와 차별이 어쩌다 겪는 일이 아니라 일상을 지배하며 실존의 뿌리를 뒤흔든다는 뜻이다.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서는 이 정부가 정말 촛불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정부인지 의문을 지우기 어렵다. 민주당은 야당, 여당 시절을 불문하고 차별금지법과 관련해 일관된 입장을 보이지 않아 유권자들을 헛갈리게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참여정부시절 차별금지법이 추진되던 때는 비서실장 등 요직에 있었고, 2012년 대선 때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했다. 하지만 지난해 선거에서는 차별금지법을 만들지 않겠다고 훨씬 후퇴한 입장을 보였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과 586세대의 참모들이 차별과 혐오의 고통과 위험성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집권 이후 보여준 감동적인 정치적 행보는 의심의 여지를 추호도 남기지 않는다. 선거운동 기간 중에 회자되던 ‘나중에’라는 구호를 미뤄 짐작하건대 좀 천천히, 나중에 제정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본질상 인권은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권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엄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이며, 차별 금지와 평등 보장은 인권의 핵심 가치이자 본질이기 때문이다.

나중으로 미룬 결과가 어떤 인권유린을 낳았는지는 지난 10년간이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유엔은 2007년부터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해왔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를 비롯해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아동권리위원회, 자유권위원회 등 각종 유엔기구들이 한목소리를 내왔다. 차별금지가 인권보장의 핵심과제이며 국가의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데 그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뜻이다.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학력 및 병력.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명시될 차별 금지 사유들이다.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빠질 수 없으며 빠져서도 안된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차별을 당해도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사회권위원회는 특히 ‘긴급하게’(urgent)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언급했다. 새해는 문재인 정부가 인권국가의 모습을 구체적 정책으로 만들어갈 중요한 시기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 첫걸음을 떼는 새해가 되길 바란다.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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