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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일상이란 어떤 사람에겐 여유로운 평온함이겠으나, 어떤 이에게는 하루가 힘든 처절한 생존투쟁의 연속이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일상은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상호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최상층의 결과물이다. 코로나19 이후에 대한 비관적인 관측은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더라도 다시는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전제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 같다.

상황이 불확실하고 총체적인 전망도 불가능한 것이 위기의 특징이다. 위기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을 의미한다.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랜턴의 불빛을 보고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 같은 분석과 처방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이다.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는 분명한 것과 불확실한 것을 구분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탱해온 지배적인 원리들이 용도폐기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앞에서 신자유주의의 거의 모든 교시들은 무력해졌다. 전 지구적 차원의 무제한적인 경쟁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으며, 시장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작고 효율적인 정부는 위기 앞에 무력했다. 크고 강력한 정부라고 해서 효율적으로 상황을 대처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 군사비 절반을 사용하는 미국은 코로나19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무리 크고 강력하더라도 정치의 관심이 인민의 삶을 직접 지향하지 않으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지배적인 원리들이 용도폐기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은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다.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뒤를 무엇이 이을지는 불확실하다. 헨리 키신저는 코로나19가 세계질서를 영원히 바꿀 것이라며, ‘글로벌 무역과 자유로운 이동을 기반으로 번영하는 시대’에서 시대착오적인 ‘성곽시대’의 사고가 되살아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가 언급한 ‘성곽시대’가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으나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성곽시대’가 어떤 내용인가와 관계없이 키신저의 주장은 자기모순적이다. 코로나19 이후 세계질서가 영원히 바뀔 것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 지금이 ‘번영의 시대’라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키신저가 칭송해마지 않는 ‘번영’은 일부 국가와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극심한 생태계 파괴의 대가라는 점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다. 미래의 대안을 고민하기보다 과거의 자기파괴적 상태로 회귀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필연적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다가오는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회피해서는 안된다.

키신저가 ‘글로벌 무역과 자유로운 이동을 기반으로 번영하는 시대’에 집착하는 이유는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국가이익이란 일부의 경제적 이익 극대화라는 동기를 전체의 애국심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미국의 국가이익이 미국 인민 전체가 아닌 월스트리트를 대변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키신저의 걱정을 신자유주의 용도폐기 이후에 대한 월스트리트의 불안감을 토로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이유다.

코로나19 상황 이후 국제정치 문제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현저하게 낮아진 것은, 우리의 삶에서 안보 문제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정치는 경제적 이익의 하위구조이다. 코로나19 이후 경제질서의 방향이 정해지면, 국제정치질서도 따라 움직일 것이다.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운동에너지가 커진다는 점에서, 세계 경제질서의 변화는 그 하위구조인 국제정치질서의 변화를 더 강력하게 추동할 것이다.

국제정치적 변화의 에너지가 어떤 방향을 지향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거의 전 영역에 걸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미·중 패권경쟁도 예외는 아니다. 미·중 패권경쟁이 격심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만일 ‘성곽시대’가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자급자족적 경제질서라고 한다면, 미국과 중국이 지금처럼 세계적 규모의 패권경쟁을 벌일 이유가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 지역과 남북관계의 기본전제가 달라진다. 적과 동지를 가르는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지도 모른다.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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