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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여러 기능 중에 ‘국민통합의 기능’이 있다. 헌법은 국가구성원 전체의 공동이익 실현을 그 내용으로 하므로, 헌법적 장치를 통해 다양한 세력의 여러 의견이나 이해관계를 국민 합의로 이끌어내어 모든 국민을 하나의 운명공동체 구성원으로 동화시키고 통합하는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헌법이 국민통합 기능을 수행하므로, 헌법을 구체적 사건에 적용하여 헌법적 분쟁을 해결해내는 헌법재판도 당연히 이런 국민통합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은 사건들에서 이런 국민통합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결정형식이 바로 만장일치 결정이다. 물론 소수자의 인권과 관련된 사건들 등에서는 오히려 활발한 소수 의견 개진이 꼭 필요한 경우도 있다. 소수자의 인권 보장을 앞당기는 전향적 헌법 판결들은 소수자 인권이 다수에 의해 외면당할 때 내려졌던 용감한 소수 의견들이 쌓이고 쌓여서 내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과 같은 고도의 정치성을 띠는 사건들에서는 소수 의견이 오히려 국민통합을 해치는 결과를 낳기 쉽다. 헌재 결정 이후에도 일부 국민들이 소수 의견에 기대어 계속해서 헌재 결정의 정당성에 시비를 거는 일들이 지속됨으로써, 정치적 분쟁이 헌재 결정으로 일단락되지 않고 이어져 국민 통합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헌법재판 담당기관들은 정치적으로 폭발성을 가지는 민감한 사건들에서 만장일치 결정을 내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경우가 많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15차 변론이 열린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헌재소장 권한대행 이정미 재판장(가운데)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내린 브라운 판결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브라운 판결이 내려지기 58년 전인 1896년의 플레시 판결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열차에서 흑인칸과 백인칸을 따로 두게 한 루이지애나 주법이 피부색에 따른 불합리한 차별로서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원고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합헌 결정을 내린다. 아무리 인종에 따른 분리 수용이라 하더라도 열차 차량 시설, 운임 등 유형적 요소에서 백인칸과 흑인칸이 차이가 없다면 불합리한 차별이 아니라는 요지였다. 이 플레시 판결은 소위 ‘분리하되 평등의 원칙(separate but equal)’이라는 미국 판례법상의 대원칙을 만들어냈고, 이 원칙은 미국 사회에서 열차뿐만 아니라 버스, 공원, 식당, 극장 등 공공시설과 초등학교 등 교육현장에서의 흑백분리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 후 흑백분리 수용의 헌법적 정당성은 미국 사회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면서 ‘흑백 갈등’이라는 정치적 분쟁의 주된 원인이 된다. 이러한 정치적 분쟁을 만장일치의 위헌 결정을 통해 종식시킨 것이 바로 1954년 브라운 판결이다. 브라운 등 흑인 아동들은 캔자스 주법에 근거해 초등학교에서 흑인학교와 백인학교를 따로 둔 토피카 시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인종차별에 의한 평등권 침해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다. 당시 연방 대법원에 근무했던 이들의 전언이나 언론 기사, 흑인학생들을 대리한 피고인 측 변호사들의 비망록 등에 따르면 연방대법원에 처음 소송이 제기되었을 때 적지 않은 재판관들이 ‘분리하되 평등의 원칙’ 적용을 유지해 합헌의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빈슨 대법원장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사로 후임 대법원장이 된 워런 대법원장은 이 사건에 대해 위헌 입장을 굳히고 합헌의 입장을 보이던 대법관들을 한 명씩 설득해서 만장일치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다. 교과과정, 학교 시설, 교사의 질 등 유형적 요소에서 흑인학교와 백인학교가 평등하다 할지라도 흑백분리 교육 자체가 흑인 아동들에게 지울 수 없는 열등의식을 심어주고 흑백인종이 통합된 교육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이익들을 박탈하기 때문에 불합리한 차별이 되어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요지였다.

그 후 이 판결은 교육현장뿐만 아니라 공공시설 등 타영역에도 널리 확대 적용되어 나가면서 흑백분리에 따른 미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치유하고 미국 국민을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해낸다. 이 사건에서 워런 대법원장이 왜 만장일치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내려 했겠는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서 소수 의견은 그 판결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재판에 대한 끊임없는 시빗거리를 안겨주고 불복의 빌미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정치적 논란이 심한 사건에서 국민통합을 위해 만장일치 결정이 꼭 필요한 이유를 이 브라운 판결이 잘 웅변해주고 있다.

헌법재판이 일반 재판과 다른 결정적 구별점이 있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재판이라는 점이다. 헌법재판관들은 무엇이 이 나라의 헌법가치의 수호와 국민통합을 위한 결단인지를 스스로에게 집요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 물음 뒤에 답을 구하면 답이 보인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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