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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작년 10월부터 올봄까지 이어진 촛불의 경이로운 힘은 헌정질서를 짓밟은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 정부를 앞당겨 탄생시켰다. 이미 끝난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 붉게 표시된 12월 달력을 마주칠 때마다 누구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하다. 파면된 전임 대통령이 내년 2월까지 자리를 지키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떤 일을 겪고 있을까? 역사 해석에 가정은 금물이라지만, (북이 연초에 예고한) 제6차 핵실험과 연이은 미사일 발사 탓에 남북 간의 긴장은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벌어진 서해의 무력 충돌들을 뛰어넘어 수백, 수천명이 죽고 다치는 우발적인 국지전이 터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명백한 것은,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제재가 우리 경제에 큰 피해를 끼치고 다양한 분야의 정상적인 한·중 교류가 교란되어 동아시아의 평화를 크게 해치고 있을 것이다.

또 임기 6년의 대법원장 자리에 전혀 다른 인물이 앉아 있고, 새로 임명된 대법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인적 구성 역시 소장을 포함하여 딴판이 되었을 터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실행했을 뿐이라는 무책임한 국민의 ‘공복’들은 자신의 사익을 위해, 혹은 확신에 차서 나라를 갉아먹는 중일 것이다. 아니, 야권의 취약한 역량에 분열까지 더해지고 비밀정보기관을 총동원한 대선개입의 변수까지 감안하면 정권교체조차 확신하기 어려웠기 십상이다. 그리고 세월호는 여전히 바다 밑에 잠겨 있을 터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꾸준하게 70%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더불어민주당 지지율도 50%를 넘나든다. 그러나 이 수치는 수구정권 9년의 패악질에 질린 국민들이 새 정부가 잘하기를 바라는 조건 없는 응원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언제든지 물거품처럼 꺼질 수 있다.

참여정부에 몸 담았던 전문가들부터 새 정부의 지나치게 신중한 행보를 우려한다. 사회적 양극화를 완화할 복지정책, 노동정책 등 산더미 같은 국정과제를 풀어내려면 추가 재정확보가 필수적이고, 정권 초기에 과감한 증세 추진으로 선회해야 마땅하다. 또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의료보험의 보장 확대 등 상징적인 민생 공약에 대한 반발과 공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한층 정교하고 구체적인 방책이 요구되고 있다. 집권당이 국회에서 소수라서 개혁이 힘들다는 판단은 그릇된 것이다. 만약 현재의 높은 국정 지지도에 더해 여당 의석이 국회선진화법의 문턱도 넘을 180석이라고 해보자. 과연 적폐청산과 개혁이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울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청와대와 여당 핵심부가 안이하고 오만한 정세 인식에 빠져 거푸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민심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촛불집회에서 나온 ‘우리 안의 최순실’에 대한 성찰을 기억할 일이며, 그만큼 새 정부에 붙어 개혁의 첨병 흉내를 내며 약삭빠르게 변신할 자들이 우리 사회에 널려 있다.

청와대와 집권당은 명분과 원칙 있는 협치를 통해 2020년 총선에서 수구냉전세력, 즉 자유한국당의 몰락을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 내년도 예산안 국회 합의 과정에서 그러한 협치의 가능성과 효과는 확인되었다. 국민의당과 정의당, 사안에 따라서는 (고사 위기에 처한) 바른정당까지 함께하는 슬기롭고 겸허한 정치적 노력을 통해 바뀔 생각조차 없는 수구냉전세력을 정치판에서 퇴장시켜야 한다. 따라서 스스로 반성하고 변화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있다면 연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또 여당의 자기혁신이 앞서야 함은 물론이고 집권층과 만날 기회가 없었던 다른 정파의 능력 있고 양심 있는 인물들을 찾아내 등용해야 한다.

순전히 개인적 생각이지만, 내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을 거치며 수구세력의 정치적 해체를 마무리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또다시 어려운 지경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북핵 위기는 참으로 엄중하고, ‘우리 안의 최순실’은 끈질기며, 기득권에 깊이 물든 관료층은 진보개혁을 자처하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을 포획할 능력과 의지가 넘쳐난다. 존재감 없는 정의당의 곤경이 잘 드러내듯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연대가 튼튼하지 못한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민중운동 진영도 새 정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비전과 역량이 모자란다. 모두 정신 차려야 한다.

2020년 총선까지 2년여 동안 우리는 반드시 촛불항쟁을 촛불시민혁명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그때까지 남북 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장담하기는 어렵겠지만, 촛불혁명은 분단체제를 허물고 새로운 한반도를 건설하는 길이다. 내후년인 2019년은 마침 우리 헌법 전문에 으뜸으로 언급되는 3·1운동 100주년이며, 3·1운동은 남북 양쪽이 모두 중시하는 민족운동의 혁명적 사건임을 명심할 일이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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