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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내리는 수요일 오후 약수동을 걸었다. 1950년대 후반 그곳에서 살기 시작하여 1970년대 말 그 동네를 떠났으니, 나는 약수동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셈이다. 남쪽으로는 한강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남산이 지척의 거리에 있는 약수동은 그 시절 나의 원초적 감수성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국의 도시 파리에서 살았던 17년을 제외한다면 줄곧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추억의 공간을 다시 찾아갈 수 있었지만, 나는 늘 그곳을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거나 지하철을 타고 통과했을 뿐 아무 할 일 없이 무작정 걸어 본 적은 없었다.

지하철 3호선 약수역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면 약수동 로터리가 나온다. 그곳에 한참 멈추어 서서 50여년 전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약수동 로터리는 매일 학교로 가는 통학로였으며 심심하면 장충단공원으로 놀러가는 통행로이기도 했다. 로터리에서 청구동으로 내려가는 길의 보폭은 그대로인데 장충단공원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은 1980년대 고가도로를 만들면서 두 배 이상 넓어졌다. 그 바람에 언덕길 오른쪽 높은 축대 위에 줄지어 서 있던 일본식 이층 양옥집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고갯길을 넘으면 장충체육관이 나온다. 그곳에는 원래 소규모의 복싱 도장이 있었는데 1960년대 초 지붕이 덮인 엄청나게 큰 실내체육관으로 변모했다.

서울 장충동·약수동 일대의 랜드마크인 장충체육관이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15년 초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린 시절 나의 활동무대는 우리집을 원점으로 하여 남쪽으로는 버티고개, 서쪽으로는 장충단공원, 동쪽으로는 해병대산, 그리고 북쪽으로는 신당동으로 금 그어지는 원형 공간이었다. 그 너머는 더 이상 가면 안되는 위험한 공간이었다. 약수동 로터리에서 출발하여 버티고개 쪽을 향해 걸었다. 1960년대에 지은 퇴락한 약수시장이 헐려나가고 기초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 소방서가 50여년 전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약수동에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인들이 살던 번듯한 집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 소방서는 아마도 그 시절 일본인들의 재산을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소방서를 끼고 골목으로 걸어들어가니까 ‘Namsan International Kindergarten’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곳은 원래 명지대 이사장이 살던 큰 집터였다. 옛집은 사라지고 집터 한구석에 새로 지은 명지대학교 재단 건물만 보였다.

골목길을 더 걸어 올라가면 높은 담장 안에 키가 큰 나무들이 서 있는 일본식 양옥이 있었는데 그곳은 서양화가 유영국의 집이었다. 오늘날 화가의 집은 사라지고 그 집 앞에 서있던 나무 전봇대는 우람한 콘크리트 전봇대로 바뀌어 있다. 1960년대 그 부근에는 탄광 사장, 은행장, 변호사, 군장성 등의 동네 유지들과 방앗간집, 목욕탕집, 솜틀집 등을 비롯해서 약수시장에서 갖가지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 그 시절 골목의 완만한 언덕길에는 우마차가 모래와 시멘트 등을 가득 싣고 힘겹게 지나다녔다. 1950년대 말부터 매봉산 일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가난한 사람들이 달동네를 이루며 살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마차에 실려가던 건축 자재들은 그들의 허술한 보금자리를 짓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그 달동네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산등성이에 펼쳐졌던 서민들의 무허가 정착지는 우여곡절을 거쳐 40여동의 고층아파트로 이루어진 ‘남산타운아파트’라는 거대한 주거 단지로 변모했다. 원래 매봉산은 태조 이성계가 매 사냥을 하던 곳이었는데 초등학교 시절 나는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그곳에 식물채집과 곤충채집 숙제를 하기 위해 올라가곤 했다. 그곳에는 다양한 풀꽃들이 자랐고 나비와 메뚜기도 많았다. 아파트 단지의 높은 쪽에 도달하니 신라호텔 건물이 커다란 벽처럼 펼쳐지고 멀리 동대문 의류상가의 두타빌딩과 밀리오레도 보인다. 달동네를 밀어낸 전망 좋은 아파트단지가 거기 있었다. 단지의 정문은 버티고개 쪽으로 나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등장하는 버티고개는 도둑들이 출몰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 근처에는 빈민들이 모여 살았는데 천재 시인 이상의 부모도 그곳에서 살았다.

버티고개에서 다시 약수동 로터리로 내려와 내가 다닌 청구초등학교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린 시절 지나다니던 약수서적문구와 신일교회가 새로 지은 건물이지만 옛날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 길에 있던 파출소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면 도로로 들어서니 옛날에 보았던 큰 저택 몇 채가 남아있다. 청구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교정으로 들어서자 일제강점기에 지은 옛 교사는 다 사라지고 새 건물들이 ㄷ자로 들어서서 운동장을 감싸고 있다.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이면 풍경화를 그리러 올라갔던 옛동산에는 내가 4학년 때쯤 지은 건물 한 동이 남아있다. 본관 건물 뒤로 가보니까 그 시절 ‘콩나물 교실’로 쓰던 단층 건물이 창고로 변해 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 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를 경험했고 서울이야말로 그러한 변화가 가장 극심하게 나타난 도시 공간이다. 다른 동네와 마찬가지로 약수동에도 새것이 들어서고 옛것은 사라졌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고층건물과 큰 병원과 큰 교회들이 들어섰고 골목길이 사라지고 작고 초라한 집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반 세기 전 옛 동네의 모습은 내 기억의 지층 속에 아련하게 묻혀있다. 어둠이 내린 약수동 로터리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서 있는데 환하게 빛을 밝힌 스마트폰 상점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정수복 사회학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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