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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굽어보는 국립현충원에 봄이 가득하다. 하얀 목련이 고결한 자태를 뽐내고, 홍매화의 핏빛이 영롱하다. 호국영령들의 단심(丹心)을 상징하는 듯하다. 충무정 주변에 핀 벚꽃이 공원을 방불케 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언뜻 충무공의 고뇌를 그린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 첫 구절이 떠올랐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시인의 시편도 내 뇌리를 맴돈다. 

지난 12일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서는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의 49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바로 전날은 1세기 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지난주 그 무렵, 워싱턴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평양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시 추대되었다.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로 100돌을 맞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부터 생각해 보자.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은 독립국이고 조선인은 자주국민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지 불과 한 달 열흘 뒤 제국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백성의 나라, 민국(民國)의 시대를 새로 연 것은 엄청난 역사적 진전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대한민국은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잿더미 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지난해에는 드디어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50-30클럽에 가입한 것이다.

나는 2016년 9월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한국의 동반성장’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한국은 인구가 5000만명이 넘으면서 동시에 1인당 소득이 3만달러가 넘는 6개 나라에 가장 근접해 있다. 따라서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 다음의 세계 7대 경제강국은 코리아”라고 주장했다. 비록 비공식 통계이기는 하지만 구매력 기준으로는 한국도 2016년 이미 1인당 소득이 3만달러를 넘었다.

그곳 교수들의 반론이 잇따랐다. “캐나다는 G7 국가다” “중국은 세계경제를 좌우하는 G2 아니냐”.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캐나다는 1인당 소득이 4만5000달러를 상회하지만 인구는 3400만명 정도밖에 안되고, 중국은 인구로는 초대국이지만 1인당 소득은 1만달러 내외이므로 내 기준으로는 한국이 내실 있는 7대 경제대국이라고 했다.

영어 표현으로 5000만 인구에 1인당 3만달러 소득을 뜻하는 50-30클럽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분류도, 실제로 존재하는 기구도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같은 신흥경제국이 쟁취한 50-30클럽 멤버십은 밤낮없이 돌아가는 산업현장에서, 열사의 건설현장에서, 전쟁터와 다름없는 수출전선에서 5000만 국민이 피와 땀과 눈물로 쌓아올린 금자탑임에 틀림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반세기 동안 대호황을 구가하던 세계경제는 1970년대 들어 스태그플레이션을 맞았다. 더 이상의 독주가 어렵게 되자 미국은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던 일본·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와 더불어 경제정책의 보조를 맞추자며 G7을 창설했다. 1990년대에는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를 끌어들여 G8을 만들더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한국 등 12개국을 추가하여 G20이 탄생하였다.

한국을 경제강국으로 성장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교육 및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다. 두 번째 요인은 “하면 된다”는 과감한 도전정신이었다. 

교육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과감한 도전이 가능했던 것은 더 나은 미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기에 강력한 공동체의식이 생겨났다. 희망을 공유하고 함께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경제는 성장요인이 많이 소진되어 어느덧 저성장이 새로운 현상으로 자리 잡았고, 불균형성장 정책의 결과 양극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리더십을 발휘해 우리 사회에 “경제하려는 의지”를 북돋우고 기업가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다행히 최근 정부가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워 전자(반도체), 자동차, 바이오 등 전통적 핵심 제조업을 중요한 산업정책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단기적으로 우리 경제의 회생을 위한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구체적 내용은 더 살펴보아야겠지만 말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교육혁신을 통해 창의적 인재를 길러야 한다. 무엇보다도 학원자율화가 시급하다. 또한 ‘함께 가자’는 동반성장을 우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도 시급하다. 갈기갈기 찢어진 사회를 공동체정신으로 되살리자는 것이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은 ‘새날은 언제 어떻게 오는가’라는 글에서 이런 일화를 들려준다. 

옛날 인도의 한 성자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새날이 온 것을 어떻게 아느냐?” 제자들의 중구난방식 답변이 이어졌다. 묵묵히 듣고 있던 스승은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날이 밝아 너희들이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너희 형제들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온 것이니라.”

내 이웃과 공동체 구성원들의 고통과 아픔을 내 형제들과 똑같은 것으로 느낄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조석으로 혈전을 벌이는 정치권도, 갑과 을이 반목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산업현장도 다를 바 없다. 남·남 갈등과 남북 분단의 해법도 여기에 있다. 

남북관계나 한·미관계는 자존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1953년 휴전협정 조인식에는 대한민국 대표의 자리가 없었다. 북·미 정상회담을 남·북·미 3자 정상회담으로 바꾸어 상징성과 실효성을 고양해야 한다. 북핵 문제를 해결한 토대 위에, 남북한과 지구상에 퍼져 있는 한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8000만 한민족경제공동체를 건설해야 우리가 세계경제를 주도할 수 있다. 이것이 선열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시대적 사명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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