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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 중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인 카산드라에게 자주 매료된다. 예지력을 얻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설득력이 없는 그녀는 닥쳐오는 미래를 거듭 예언하나 파국을 막지 못한다.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력을 받았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한 대가로 설득력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녀는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으면 안 된다고 절규하지만, 사람들은 외면한다. 앞으로 전개될 일이 뻔히 보이는데도 설득하지 못할 때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까.

동독의 소설가 크리스타 볼프는 1983년 신화 카산드라를 재해석한 소설 <카산드라>를 발표한다. 카산드라는 트로이 멸망 후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전리품이 되고, 아가멤논이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죽임을 당할 때 같이 살해당한다. 볼프는 카산드라의 마지막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처절했던 일생을 회상하게 한다. 볼프는 집권 통일사회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했지만, 동독을 비판한 작품들로 인해 당국의 문책을 받았다고 한다. 볼프가 이 소설을 쓴 것은 몰락해가는 동독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심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파국으로 치닫는 트로이를 바라보는 카산드라의 심정이나, 동독의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는 볼프만큼은 전혀 아니겠지만, 대한민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씁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 성향에 따라 씁쓸함의 이유와 느낌은 다르겠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거대 함선이 제대로 항해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다. 

익숙한 패턴이 머리에 떠오른다. “화려한 출범, 높은 지지, 일정한 성과의 실현, 능력과 도덕성에 대한 의문, 지리멸렬 그리고 쓸쓸한 퇴장.” 이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떤 정부에도 불가능한 것일까. 탁구공이 오가는 것처럼 정권이 교체될 뿐, 함선은 제대로 된 항로에 들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우선 정부의 능력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정부는 그 지향과 능력에 따라 함선의 방향을 조금 바꾸고 조금 더 빨리 달리게 할 수 있으나, 갑자기 하늘을 날아 목표인 항구에 도달하게 할 수는 없다. 아니 여태껏 달리던 속도에서 조금만 가속해도 배가 휘청거린다. 게다가 선의만으로 성과를 내기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다. 믿을 수 있고 윤리적이고 유능한 내 편은 너무나 적다. 민주주의 원리상 야당을 함부로 다룰 수도 없다. 여론은 변덕스럽고, 야속한 언론은 고분고분하지 않는 것이 본래의 임무다.

그런데 집권을 위한 선거전에선 장밋빛 약속이 필요했다. 유권자는 “반대하는 국민의 의견도 경청하며 신중하게 개혁을 추진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줄 만큼 느긋하지 않다. 정직하게 캠페인을 할수록 불리하며, 호언장담의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정치인만의 탓도, 유권자만의 탓도 아니다. 정치인과 유권자와 언론이 연주하는 삼중주다. 

실제로 기성 정당은 정부의 운영보다는 캠페인에 최적화되어 있다. 공장의 생산성과 상품의 품질은 부족한데, 영업과 광고 부문은 전문성이 있는 것이다. 선거에 이기지 못하면 포부를 펼칠 기회도 없고 선거에서는 마케팅이 당락을 좌우하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랬던 국민과 언론이 생산성과 품질을 요구한다. 부풀린 약속은 당연히 지킬 수 없다. 그런데 해낼 수 있는 약속조차 막상 그것을 실행할 자원은 부족하고, 우군은 줄어든다. 어느 정부든 쓸쓸한 퇴장이라는 귀결을 피하기 어려운 게 현실인 것이다.

기대에 못 미친 정도가 아니라 배반을 일삼았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비한다면, 이 정부는 분명히 진일보했고, 정상적인 정부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큰 잘못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실망을 극복할 기회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경쟁자들은 은근히 상황을 즐기고, 유권자와 언론은 점점 가혹해진다. 이것은 정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속성이고, 시효를 다해가는 낡은 정치 시스템의 필연적 결과다. 상대편을 향한 프로파간다 능력의 우위가 선거의 성패를 좌우하는 정치체제를 개선하지 않는 한, ‘승자의 저주’와 같은 패턴을 피할 수 없다.

정치를 내전의 축소판으로만 다루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구조는 어떠한가. 과거 같으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했을 다양한 세력들을 의사당에 모아놓은 것이 정치이기는 하다.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정치인들의 면면을 보면, 유혈사태가 없을 뿐 내전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가 아무리 불의하게 보여도, 적이 아무리 위선적으로 보여도,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답을 찾고 설득하는 정치를 원한다. 그런데 근거 없이 자극적인 비난을 일삼는 사람과 세력이 인지도를 높이고 정치적 이익을 얻는다. 진영논리와 확증편향을 양손에 들고 싸움터에 나선 사람들이 앞장서는 상황에서는, 어느 편이든 집권할 수는 있지만 국정운영의 성공은 요원하다. 자신과 남에게 고른 잣대를 들이대고 실사구시의 자세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밀려나는 구조에서는 결국 모두 빈손으로 떠나게 된다. 

그래도 이 세상은 신화의 세계와 다르기에, 나는 카산드라와 달리 낙관한다. 바람에 못 미치지만, 세상은 점점 나아진다. 불행해지거나 뒤처지는 영역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계속 발전한다. 유예되는 개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안타깝지만, 정치가 정체되고 심지어 뒷걸음쳐도 역사는 꾸준히 갈 길을 간다. 굶는 사람은 줄고, 전쟁은 드물어진다. 암은 퇴치되고 수명은 늘어날 것이다. 기술과 과학 그리고 그에 기반한 문제 해결 능력이 발전하는 한, 경제도 정치도 그에 걸맞은 시스템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

지난주에는 낙태죄가 헌법에 어긋난다는 결정이 있었고, 블랙홀의 사진이 공개됐다. 나는 역사 발전에 대한 낙관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기대보다 더딘 것에는 더 너그러워질 생각이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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