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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글몽글, 함께하실 거죠?”

서강대에서 스포츠심리학을 가르치는 정용철 교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숨쉬는 것만큼이나 영어를 자연스럽게 한다는 그가 모국어의 낱말을 잘못 쓴 줄 알았다. ‘몽글몽글’이라는 부사가 있다. 작은 덩어리로 된 사물의 말랑말랑하고 매끄러운 느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몸글몽글’이라니, 의아해 다시 물었더니, 또 몸글몽글이란다. 덧붙여 말하기를 언론인이자 시인인, 아니 그보다는, 1970년 문교부 주최의 스포츠꿈나무선발대회에서 무려 360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종 12명의 합격자에 포함되면서 한때 촉망받던 농구 선수의 기억을 갖고 있는 한림대 고광헌 교수가 ‘몸글몽글’이라고 작명했다고 한다.

다시, 그 낱말을 입안에 넣고는 혀끝으로 살살 쓰다듬어 보니, 과연 농구 선수 출신의 시인다운 작명이라는 느낌이었다. 몸글, 즉 몸으로 쓴 글이 몽글, 즉 말랑말랑하게 살이 올라 눈을 씻고 다시 읽어볼 만하다는 뜻이다. 요컨대 스포츠를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을 해보자는 취지이니, 평소 그런 관점을 여러 번 피력한 자로서 당연히 참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당부였다. 그래서 두 달 동안 스무명 가까운 젊은 학생들과 ‘스포츠와 나’를 주제로 여덟 차례의 변주를 했다.

스포츠 선수나 그 전공 학생들에게 왜 글쓰기가 필요한가.

사실 이 질문은, 스포츠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이면서도 즐겁게 함께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글을 쓰려면, 자기 생각부터 더듬어봐야 하고, 그렇게 생각을 여물게 하다 보면 자기와 주변 사람들을 두루 살피게 된다.

이런 과정을 어려서부터 익혀서, 마치 밥을 먹거나 걷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면 함부로 자기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고언을 기꺼이 듣게 되고 제멋대로 자기 얘기를 강요하기보다는 다른 이의 필설에 담긴 날카로운 비판을 자기의 것으로 새기게 된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글쓰기 수업을 몇 주 정도 제대로 받는다면, 그동안 주술 관계도 없고 앞뒤 문맥도 없는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에 스스로 놀라며 자신을 주어로 한 책임 있는 말들을 제대로 할 것이다. 정치란 ‘정언(正言)’이요 이는 곧 “이치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공자의 경지 말이다.



돌이켜보면, 이 나라 교육에서, 가장 크게 결핍된 것이 학생들 스스로 말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지금껏 받아쓰고 외우는 일방통행이었다. 성장 과정에서, 감성적이든 논리적이든, 스스로 말을 하거나 생각의 무릎을 오무려 글을 쓰게 하는 교육이 결핍되어 왔다.

스포츠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유소년 때부터 지도자의 강박과 명령을 몸으로 수행해야만 했고 대학이나 프로 입단 후에도 철저한 위계 서열의 부품으로 주어진 명령어를 반복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을 따름이다. 미디어에 수시로 노출되는 프로야구 같은 인기 종목 선수들은 그나마 방송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기질이 드러나는 대답을 하는 편이지만, 대다수 선수들은 말을 하거나 글을 써본 경험 자체가 전무하기 때문에 단문에 단답이거나 그마저도 거칠게 자기 감정을 내뱉는 정도다. 그래서 고광헌, 정용철 두 분이 ‘몸글몽글’을 통해, 글을 쓰거나 읽는 것 자체가 어려서부터 통제되고 금지된 스포츠 선수와 그 분야 전공 학생들을 돕고자 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짧은 인터뷰 시간에 재치 있는 대답을 해보자는 식의 기술을 익히는 게 아니다. 어떤 선수들은 과묵하고도 신중하게 답변함으로써 스포츠가 지닌 엄숙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과 주체적인 의견을 자기 내면에 견실하게 쌓아나가는 것이다. 왜 나는 운동을 하는가, 이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 몸은 어떻게 반응을 하고 그 순간 내 감정은 왜 증폭되는가, 나의 행위가 지닌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야말로 온몸을 헌신하는 이 스포츠가 이 사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등에 대한 생각 말이다.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 진출했을 때, 미국인 코치들이 끊임없이 “왜 그렇게 던졌느냐”고 묻길래 처음에는 그게 책임을 추궁하는 줄 알고 덮어놓고 “잘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차츰 현지의 격조 있는 인간관계를 파악한 후에, 그는 투구 하나하나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 코치들과 높은 수준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영표, 기성용, 손흥민 등이 해외에 진출해 처음 겪은 ‘문화 충격’도 이런 일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말을 한다는 것, 그로부터 스포츠라는 고결한 행위의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된다.

‘몸글몽글’은 바로 그런 이유로 시작된 프로젝트다. 함께해보니, 다만 기회가 없었을 뿐, 학생들이 쓴 글은 다채롭고 기발했으며 무엇보다 진솔했다. 스포츠를 전공하는 학생들답게 이 거친 세상을 몸으로 부딪친 흔적이 뚜렷했다. “혼란스러웠고 힘들었던 시간과 함께 튀어오른 손등의 혈관, 까맣게 그을린 손등, 딱딱하게 자리 잡은 손바닥의 굳은살”(서강대 이승은)에 대한 기록,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가두었던 눈빛과 강요들”(경희대 윤영조)에 대한 회상, “나를 갈기갈기 찢고 싶을 때 내 옆에서 나를 위로했던”(인천대 이병현) 인연에 대한 애달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막연하게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를 쫓았던”(서울대 박지영) 옛 시절에 대한 감정 등을 읽으면서, 나는 이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쓰거나 읽는 과정을 겪었더라면, 한국 스포츠가 더욱 따스한 풍경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수많은 선수와 학생들이 잔인한 위계질서와 폭력적인 승리주의 아래에 놓여 있다. 그들의 여린 마음속에는 날카롭게 베인 상흔들이 남아 있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생각하고, 또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몸글몽글’ 정도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스포츠 현장 곳곳에서 진행되어야만 한다. 운동기계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적 행위의 실천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말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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