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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각의 극악한 악행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탄핵심판이 합리적인 논거에 따라 진행된다고 할 때, 곧 미증유의 조기 대선이 황사보다 일찍 들이닥칠 것이다. 평소의 수순이라면 여러 후보자들의 정견이 수개월에 걸쳐 검증되고 두 달여의 인수위 과정을 거쳐 새 정부가 출범하겠지만 올해의 봄은 그 모든 과정이 압축되어 전개된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지만 오히려 인수위 과정조차 없는 지금의 상황은 어떤 점에서는 그 말이 뒤집힐 공산도 크다.
차기 정권이 10년 가까운 보수 정권의 적폐, 특히 박근혜 정권 이후 그야말로 국정 파탄의 지경에 처한 각 분야의 참담한 상황을 허겁지겁 진단하고 단기적인 처방을 내리다가 그만 집권 초기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면 ‘예기치 못한 기회가 곧 장기적인 위기’로 고착될 수도 있다.
스포츠 분야는 그 상황의 급박함과 정책 방향의 난삽함이 이중나선으로 얽혀 뒤틀릴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심각하다.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먼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은 무엇보다 스포츠 분야에서 파괴적으로 자행되었다. ‘박근혜-최순실-김종’으로 이어지는 커넥션은 중요 스포츠 정책을 뒤엉키게 하였고 그 행정의 맥락을 교란시켰다. 물론 독자적인 운영 방식을 통하여 일정한 자생성과 독립성을 유지한 각 종목의 프로 리그까지는 홍역을 치르지 않았지만 거시적인 정책 차원에서 보면 스포츠계 전반이 국정농단의 여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관료주의와 체육회의 위계서열화가 인천 아시안게임과 평창 올림픽이라는 계기적 상황과 맞물리고 여기에 음험한 시도를 한 패당들의 교묘한 술책이 끼어들면서, 스포츠계는 파행의 난국에 빠져버렸다. 오랫동안 스포츠계 전반에 드리워진 일그러진 관료주의의 바탕 위에 전개된 농단의 파장은 쉽게 개선되기 어렵다. 문체부의 다른 주요 영역, 즉 문화 정책의 ‘블랙리스트’ 파문에 대해서는 문화예술계 전반이 강력한 비판과 생산적 토론을 전개하고 있지만 위계서열에 익숙한 탓인지 스포츠계는 당연히 주장할 만한 비판이나 의미 있는 개혁 방향 제시도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과감한 진단과 처방이 시급한데, 여야의 각 주자는 아직 이렇다 할 처방전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다음으로 평창 동계올림픽이 이제는 1년도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올림픽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는 점이 금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작년에 올림픽을 치른 브라질의 대도시 리우는 무리한 개발과 신축으로 인하여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
평창 올림픽은 더욱이 애초의 무리한 스케일에 더하여 국정농단의 표적까지 됨으로써 단순히 강원도라는 지자체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의 재정 압박이라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여야 각 주자의 의견 또한 아직은 올림픽을 통한 지역 경제 발전이라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의 몇 차례 대선에서 확인되었듯이, 국정의 중요 과제에서 스포츠의 순위가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다. 스포츠는 육성해야 할 ‘하나의 분야’이거나 심지어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그쳤을 뿐 국가적 차원의 정책 우선순위가 되지는 못했다. 전두환 정권 때의 ‘88올림픽’도 독재 정권의 안정적인 권력 이양이라는 목표가 노골적으로 전개된 프로젝트였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점에서 여태 유력 주자들의 의견 표명이 눈에 띄지 않는 점도 스포츠가 비중 있는 ‘국가 어젠다’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강조하건대 바로 이러한 생각의 의미 있는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돌이켜 보면 한국 스포츠의 ‘근대 프로젝트’는 ‘국민 만들기’와 ‘동원된 신체’라는 성격이 짙었다. 스포츠를 통하여 개인의 욕망을 발현하고 이를 통하여 개별 도시나 계층의 자연스러운 연대가 진행된 서구의 스포츠문화와는 결이 달랐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교육 지침이나 일제의 ‘황국신민’ 정책, 그리고 이러한 ‘국민동원’ 방식을 전면화한 박정희 정권의 ‘체육 정책’에서, 사람의 신체는 통제와 동원의 대상이었다.
88올림픽은 물론이고 다양한 사회적 열망의 집합적 표현이 두드러졌던 2002 월드컵의 ‘광장문화’ 역시 ‘하나 되는 대~한민국’으로 귀결되었다. 많은 변화와 시도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 구습이 우리의 스포츠를 통제하고 있는 지배적 정념이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단순히 스포츠계 내부의 과제가 아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신체적 활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며 이는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하느냐 하는 중요한 사회적 판단이다. 과도한 경쟁, 비단 타인과의 경쟁만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신체를 혹사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자기 학대의 시대’를 벗어나는 것, 그것의 출발점이 스포츠다.
성과 업적 중심의 경쟁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저마다의 경제적, 신체적 조건 속에서 풍요로운 활동을 펼쳐나가는 것, 그것을 통하여 시민들이 감시와 동원의 신체에서 벗어나 몸의 활력과 사회적 해방을 쾌활하게 체험하게 하는 것,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20세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단순히 쾌적하게 경기를 관람하거나 생활 주변에서 스포츠를 쉽게 할 수 있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국가가 시민들의 신체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은 충분히 국정 지표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점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비중 있는 국정 과제로 인식하는 주자를 보고 싶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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