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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인 경쟁 도시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나약하기 그지없는데, 어찌하여 그들은 광장으로 나가서 촛불을 들어 인간적 위엄을 보여주는가. 2만이 20만이 되고 200만이 되어 촛불 광장에 모이는 것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분노, 그 이상의 어떤 사회적 근거와 심미적 갈망에 의한 것이 아닐까.
매사가 굴욕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이 대도시는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에게 노골적인 협박과 묵시적인 협력을 강요한다. 그래도 옛날보다 경제 규모가 커졌고 일상의 기본적인 도구 차원에서는 확연히 발전한 게 사실이다. 저 가난했던 시절의 수도나 위생 시설은 오늘 제법 편리하고 말끔하게 변했다. 그러나 옛날의 재래식 화장실에서 벗어나 오늘의 깔끔한 위생 시설 위에 잠시 앉았다 해서 사람이 세상과 맺는 불평등하고 불안한 ‘관계’가 바뀐 것은 결코 아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사람들의 무기력하고 짜증 섞인 표정의 골짜기에는 차별과 불평등이 초미세먼지처럼 깔려 있다. 이 ‘헬조선’의 심란한 공기에 깔려 질식할 듯하면서도, 그래도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세상을 향한 탈출구가 되고 눈가에 아직 묻어 있는 눈물 자국이 강렬한 정서적 연대의 힘이 되어 광장으로 천, 천, 히 걸어가게 된다. 반드시 정치적 집합 행동에 대한 이론을 익히거나 사회 변동의 개념을 읽어야만 그 작은 촛불 하나를 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는, 특정한 정치 상황에 격분하여 감정을 앞세워 광장에 모여드는 행렬을 걱정한다. 역사의 어떤 국면이 보여준, 넘실대는 열정의 일부 과잉된 행동이 그런 우려를 낳는다. 그러나 이는 어떤 점에서, 공안적인 관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안당국은 ‘평소 사회에 불만을 품던 중 화를 참지 못하고’ 하는 식으로 저항의 행렬을 제 감정조차 추스르지 못하는 한낱 소동으로 격하해왔다. 심지어 스스로는 판단 못하고 용기도 없는데 우연히 선배나 친구를 ‘잘못 만나서’라고 폄훼하였는데, 실은 이 모두가 정교한 치안 전술이다. 불가피하게 체포된 자들에게 그런 식의 모멸을 줘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는 자가 돼 평생 고개 숙인 채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2만의 촛불이 200만의 광장이 되는 것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묘사된, 결연한 감정의 심미적 저항이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삶도 죽음도 아닌 희미한 시공간 속에서 주눅 든 삶, 그리하여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는 처절한 심정이야말로 겨울 광장의 촛불을 끝없이 일렁거리게 한 정서적 힘이었다.
지난주에, 영화배우 고수와 정우성의 인터뷰를 봤다. 고수는, 시간을 거슬러 가는 영화의 개봉을 앞둔 행사에서,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2014년 4월16일’이라고 답했다. 영화 <고지전>과 드라마 <황금의 제국> 등을 보면서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는 그의 연기력에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 대답을 하는 순간만큼은 연기가 아니었다. 침묵 다음으로 무거운 대답이었고 대답 이후 고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4월16일’이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하면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는 표정을 한 박근혜 정부에 의해 블랙리스트에도 오른 배우 정우성 또한 이른바 ‘개념 발언’을 여러 차례 했는데, 그 역시 유년기의 ‘가난’에 의하여 자신이 어떻게 성장하고 단련되었는지를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아차, 나는 방금 ‘개념 발언’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연예인들의 확신에 찬 발언이나 행동을 ‘개념’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기는 해도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연예인들은 그런 말을 할 만한 조건이나 용기나 공부가 결여된 게 아닐까 하는 선입견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선수의 결연한 발언이나 행동을 ‘개념 발언’이라고 하는 것은 그 행위를 한편 존중하면서도 그저 ‘튀는’ 행동인 듯 보이게 한다.
여기 한 선수가 있다. 정찬성! 지난 5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3년6개월 만의 복귀전을 1라운드 KO로 장식했다. 경기 직후 링 위에서 정찬성은, 인터뷰를 정리하려는 사회자의 마이크를 빼앗다시피 해서 “이번만큼은 마음이 따뜻하고 강력한 지도자가 탄생하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그 이후 정찬성은 국내외의 대다수 팬들로부터 ‘개념 선수’라는 극찬을 받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이 말을 하기 전에 “제가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겠는가. 선수들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묵시적 강요가 한국 스포츠 문화이기 때문이다. 1월22일 열린 프로배구 올스타전에서 김희진 선수가 ‘최순실 패러디’ 세리모니를 했다가 일부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이에 한국배구연맹이 사과와 해명이 담긴 입장문을 발표한 게 엊그제 일이다. 이런 문화에서 선수들은 자기 몸을 단련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적어도 굴종까지는 아니어도 어떤 경우에도 침묵할 것을 내면화하게 된다.
그러나 정찬성은 몸에서 우러나는 말을 했다. 큰 부상에 따른 3년6개월의 공백. 그 와중에 겪었을 혹독한 훈련. 그러나 정찬성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부상과 고통의 상흔들이 동시대의 헬조선을 짓누르는 공기와 다를 바 없음을 느꼈고 그것을 어퍼컷을 날리듯 토로했다. 가난한 자, 외로운 자, 침묵의 강요가 몸에 새겨진 자들을 대신하여 그가 고통을 이겨낸 선수 특유의 몸으로 말을 하였다. 원컨대 ‘이런 말을 해도 될지’라는 단서조차 이제는 사라지기를.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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