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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슈틸리케 신드롬’이 부는가. 뛰어난 스포츠 지도자에 의해 일취월장의 성과가 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곧장 사회에 투영해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 같은 말로 활용한다. 2002 월드컵 4강 직후 ‘히딩크 신드롬’이 크게 불었고 WBC 세계야구대회 준우승을 이끌었던 김인식 감독이나 국내 리그를 평정한 김성근 감독도 이 열망의 봉화를 이어갔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큰 성과를 거둔 홍명보 감독도 한때는 ‘맏형 리더십’의 표상이었다.
이제 그 열망을 축구 국가대표팀의 슈틸리케 감독이 잇고 있다. 예컨대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지난 6일 가진 임원 간담회에서 “무조건 많은 골을 넣는 화려한 경기를 하기보단, 한 골을 넣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실용주의 리더십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여러 기관과 기업에서도 ‘슈틸리케 리더십’이 회자되고 있다.
이렇게나마 외부로부터 강렬한 메시지를 수혈받는 게 나쁜 것만은 물론 아니다. 이석문 제주특별자치도교육감은 지난 2일 제주도의회 인사말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의 학교에서는 선수들에게 승리하는 법을 가르칠 뿐 축구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를 언급하면서 “이 같은 뼈 있는 조언은 비단 축구만이 아닌, 우리나라 교육에 전하는 중요한 화두”라고 강조했다. 우리 모두가 냉혹하게 느끼는 바이지만 슈틸리케라는 거울을 통해 자성하는 계기라도 되는 것이니 ‘슈틸리케 신드롬’은 당분간 더 불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이런 열망은 우리 사회 전반의 리더십이 얼마나 빈곤한가를 역설로 보여준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20세기식 불도저 리더십은 오래전에 수명을 다했음에도 여전히 관료 사회와 기업에는 상명하복의 구태가 일상 깊숙이 찌들어 있으며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정보기술 업계의 비교적 신선한 리더십도 허황된 ‘대박 신화’로 젊은 세대를 현혹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첨단 시대에 최고의 엘리트들이 수첩을 꺼내들고 일제히 대통령이나 장관의 말을 받아적는 풍경이란 21세기의 대명천지에 참으로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스스로는 구태에 찌들어 있으면서 하급 직원이나 국민을 향해서는 소통이니 변화니 큰소리를 치는 일들이 난무하는 양상이니 ‘히딩크 리더십’도 그렇고 ‘슈틸리케 효과’도 그렇고 일순간의 자극일 뿐이다.
물론 그 주삿바늘은 따끔하다.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를 진단하면서 “(승리 지상주의에 찌든) 고등학교·대학교 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면 안된다”고 일갈했다. 그는 축구 발전을 위한 대원칙을 천명한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학원 스포츠에서 어떤 일이 수십년 동안 벌어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또 “축구가 이 사회에서 중요해졌으면 한다. 경기를 중계하다가 도중에 끊어버리는 불상사는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는데 국내 리그 자체를 생중계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침묵할지도 모른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에게 의견을 물을 때가 있다. 다 눈치만 보고 있더라. 자기 생각을 확실하게 말하는 선수가 없다”고도 말했는데 이제는 누군가가 그에게 한국 축구의 ‘쌩얼’을 좀 더 진솔하게 들려줄 필요가 있다.
▲ 한국 축구 문제점 지적한 그
실상 제대로 알면 더 놀랄 듯
소통 중시 이랜드FC 기대감
요컨대 문제의 열쇠는 문제가 발생한 곳, 곧 우리 내부에 다 내장되어 있다. 저 19세기의 위대한 사상가가 말한 대로 문제는 “(그것의) 해결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들이 존재하거나 그 생성 과정에 있을 때” 등장한다. 이를 직시하고 실사구시로 해법을 찾아낼 때 외부자의 따끔한 주사가 진정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나는 그 의미 있는 사례로 이랜드FC를 주목하고 있다. K리그의 수많은 팀들 중 대다수는, 대기업이 주관하는 몇몇 팀 말고는, 안팎의 난제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의욕적으로 출범한 이랜드FC는 기존의 팀들이 반복해온 관행을 따르지 않고 획기적이고 신선한 팀 빌딩을 보여주고 있다.
신인 선수 공개 테스트인 ‘THE OFFER(디 오퍼) 2015’ 현장을 상기해보자. 이랜드FC는 ‘프로’답게 냉정하고 꼼꼼하게 테스트를 실시하면서도 역시 ‘프로’답게 참가한 후보 선수들을 극진하고 정중하게 대우했다. 지켜본 기자와 팬들, 그리고 무엇보다 선수들이 ‘프로’를 ‘프로답게’ 예우하는 팀 분위기를 호평했다. 레니 감독은 참가자들의 프로필을 보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실력을 확인해 2014년 챌린저스리그(4부리그) 득점왕 최유상 선수를 발탁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너에 대해서 말해달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라고. 이렇게 진지하고 정중한 물음을 그 어떤 선수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랜드FC의 홍보와 마케팅을 전담하는 팀의 이름은 ‘커뮤니케이션팀’이다. 기존의 일방향적인 공세 수단을 이런 이름으로 바꿔서 쌍방향으로 소통하겠다는 흐름이 최근 여러 기업에서 시도되고 있지만 프로축구팀에서는 이랜드FC가 처음이다. 구호만 거창한 게 아니다. 지난해 12월29일, 팀의 첫 공식 행사인 ‘퍼스트터치’ 때 이미 100여명의 팬들이 효창운동장을 찾았을 정도로 이들의 커뮤니케이션, 즉 쌍방향의 소통은 주도면밀하다. 이 새로운 시도를 이끌고 있는 권성진 팀장은 “선수를 존중하고 팬을 존중하고 궁극적으로 축구를 존중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문제가 발생한 곳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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