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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이번 설 민심은 씁쓸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박지성 얘기다. 차례 지내고 둘러앉아 새 정부며 부동산이며 애들 크는 얘기 다한 후에 자연스레 축구 얘기로 이어졌는데, 아쉽게도 박지성에 대한 가족 친지들의 논평은 예전만 못했다. 몇 해 전이었더라면, 그러니까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던 때의 설 민심은 이렇지 않았다. 뿌듯해서 할 얘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 설은 씁쓸했다. 


박지성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구 반대편의 설을 축하하기 위한 이벤트인 듯, 이번 연휴 때 스완지시티와 퀸스파크 레인저스(QPR)가 맞붙었으나 기성용이 탄탄한 수비력으로 활약하는 동안 박지성의 이름은 계속 대기 명단에 머물러 있었다. 7년 동안 은하계 극강의 팀 맨유에서 주전급 선수로 활약했던 박지성이 리그 최하위 QPR에서는 축구화 끈을 조여보지도 못하고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우리로서는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감독님 저는 언제 나가죠 (경향신문DB)


며칠 전에도 그랬다. 지난 6일 런던에서 열린 한국과 크로아티아의 대표팀 평가전 때 박지성은 QPR의 수석코치 케빈 본드와 함께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보았다.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지 2년 남짓 지났으므로 그가 다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설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관중석에 앉아 있는 박지성의 모습은 우리로서는 익숙지 않은 모습이다. 


팀 상황부터 여의치 않다. QPR의 해리 레드냅 감독은 전임 마크 휴즈가 영입한 그라네로 선수와 보싱와 그리고 박지성에게 벤치를 따뜻하게 하는 역할만 부여하고 있다. 홈팬들의 격렬한 야유도 좀처럼 칭찬의 함성으로 변하지 않고 있다. 지난달 29일 맨체스터시티와의 홈경기 때 레드냅 감독은 박지성을 후반 43분에 교체 투입했다. 홈팬들에게 화풀이할 먹잇감을 던져준 듯했다. 엄청난 야유 속에 잔디를 밟긴 했으나 박지성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QPR 동료들은 일부러 패스를 하지 않았다. 박지성이 공을 잡으면 홈팬들의 야유가 더욱 거세질 것을 우려한 동료들의 배려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지성은 올해 32살이다. 아직 현역 생활을 2~3년 더 소화할 수 있는 나이다. 대표팀 은퇴선언 이후 박지성은 프리미어리그에 집중했고, 비록 QPR로 이적한 후 시련을 겪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가까운 시일 안에 완전히 은퇴할 상태까지는 아니다. 아마도 이번 시즌을 끝으로 QPR 생활을 끝내고 다른 팀에서 한두 시즌 더 뛰게 될 것이다. 


그 이후, 박지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언젠가 은퇴할 것이다. 어쩌면 여러 상황 때문에 그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있다. 그의 무릎과 발목 상태는 오래전부터 악화되어 있었다. 그가 대표팀 은퇴를 결심한 데는 거의 시간 단위로 측정하고 분석한 맨유 의료진의 면밀한 데이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데이터는 QPR 이적이라는 야속한 결정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박지성이 언제까지 가히 육박전에 가까운 잉글랜드 축구의 한복판에 서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온다고 해서, 나는 박지성이 완전 귀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박지성이 오랫동안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유럽 축구의 한복판에서 활동하기를 바란다. 물론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국내 프로팀의 코치로 크게 조력할 수 있고 조금 더 내실을 충만한 후 언젠가 대표팀을 지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국내로 복귀하는 것보다 유럽 축구의 한복판으로 계속 진입하기를 더 원한다. 


이동국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하던 시절의 박지성을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아직 고교생 같은 선수’라고 기억한다. 당시 그는 ‘기량이 뛰어난 것 같지’ 않았고 ‘천재형 선수’가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작은 패스 미스조차 없이 부지런히 공간을 찾아 움직이던 선수라고 그는 기억한다. 이동국에 따르면, 박지성은 묵묵히 자기 목표를 정해 정진하는 선수였고 일어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기 위해 축구 훈련 이상으로 노력했으며 마침내 ‘성실함이라는 재능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천성과 자질을 가진 박지성이라면 앞으로 유럽 축구의 한복판에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다. 언젠가 은퇴하게 되면 그는 높은 차원의 코칭스쿨을 연마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국제축구연맹이나 유럽축구연맹이 주관하는 고도의 스포츠 네트워킹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다. 그가 귀국해 프로팀을 맡거나 축구협회의 중책을 맡는 것도 아름답지만 유럽 현지의 프로리그 감독이 될 수도 있고 세계 축구 행정의 중심 기관에서 일할 수도 있다. 


박지성은 2002년 네덜란드의 PSV 에인트호벤을 시작으로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럽 정상급 리그의 정상급 선수였다. 이런 능력과 경력의 현역 선수를 앞으로 우리는 좀처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능력과 경력을 지닌 세계적인 선수들이 머지않아 세계 축구의 기술과 정책과 교육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현재 박지성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현역 선수들 중에서 장차 베켄바워나 플라티니 같은 존경 받는 실력자들이 배출될 것이다. 박지성은 바로 그러한 그룹의 일원으로 충분히 활동할 수 있다. 


지금 박지성은 비록 QPR의 벤치에 앉아 있지만, 곧 털고 일어나 그라운드를 몇 차례 더 누빌 것이며 그 이후 그는 세계 축구의 중심적인 인물로 활약하게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나는 이번 설에 벤치 신세가 된 박지성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조카들에게 웅변했다. 얘들아, 자고로 큰 고기는 큰 물에서 노는 법. 박지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더 큰 인물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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