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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2007년 3월21일. 터키 출신의 명장 세놀 귀네슈가 FC서울 감독을 맡았을 때 풍경이다. FC서울은 라이벌 수원 삼성을 홈에서 맞이해 4-1로 대파했다. 이날 박주영이 해트트릭을 했고 정조국이 쓰러져가는 수원이라는 거함에 화룡점정의 포화를 한방 더 날렸다.
종료 직전, 3만5000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귀네슈 감독은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곧 종료 휘슬이 울리면 홈팬들은 선수단 전체에게 박수 갈채를 보낼 게 뻔한 상황. 감독은 해트트릭을 포함해 시종일관 경기를 주도한 박주영이 홈팬들의 박수 갈채를 홀로 받을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다.
그런데 조금 매끄럽지는 못했다. 기립박수로 환호하는 홈팬에게 박주영은 답례를 해야 했는데 이것이 심판의 눈에는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것으로 비쳤다. 심판은 빨리 나가라고 지시했고 그리하여 영광의 순간은 조금은 일찍 끝났다.
물론 대패 직전의 수원 선수들 입장을 생각한다면 대승을 앞둔 팀이 선수 교체로 시간을 끄는 게 마뜩잖은 풍경일 수 있다. 그러나 홈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한 선수가 팬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물러나는 풍경은 자주 벌어지지 않는다. 경기 도중에 선수 교체를 다 해버려서 ‘단독 샷’의 기회를 주려고 해도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이런 점을 두루 고려하여 박주영에게 ‘단독 샷’의 기회를 제공한 귀네슈는 축구와 그 문화의 인간적 측면을 잘 알고 있던 감독이었다.
최근 보았던 아름다운 교체 풍경은 기성용이 활약하는 영국 웨일스의 스완지였다. 스완지는 지난 2월25일, 2012∼2013시즌 캐피털 원컵 결승전에서 브래드퍼드를 5-0으로 완파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날 경기에서 기성용은 중앙수비를 맡아 창단 101년 역사의 스완지가 사상 처음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날 기성용은 후반 18분에 개리 몽크와 교체되어 나갔다. 4-0으로 앞선 상황이므로 팀의 간판이 된 기성용의 체력 안배를 위한 교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카엘 라우드럽 감독은 수비수 개리 몽크를 위한 시간까지 안배했던 것이다. 몽크는 스완지가 지금보다 더 허약했을 때부터 팀에 합류해 10년 가까이 하위 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까지 그리고 메이저대회 우승까지 스완지의 오욕과 영광을 함께한 노장이었다. 라우드럽 감독은 몽크 같은 스완지의 오랜 노장 선수가 직접 그라운드를 밟으면서 우승컵을 들어올릴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교체해 그 우승 순간의 잔디를 밟게 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선수 교체도 기억할 만하다. 2002 한·일월드컵 16강전 때 기억 말이다. 이탈리아에 0-1로 끌려가던 상황에서 히딩크 감독은 김남일을 빼고 황선홍을 넣었다. 김태영을 빼고 이천수를 넣었다. 홍명보를 빼고 차두리를 넣었다. 이렇게 하여 설기현과 안정환을 포함해 무려 5명이 최전방 공격을 맡는 희대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선수 교체 상황은 실로 수십가지다. 감독은 승패, 득점, 부상, 상대 진영의 변수, 앞으로의 리그 상황 등을 순식간에 고려해 판단을 내린다. 절묘한 ‘신의 한 수’는 오랜 훈련과 직관이 스파크를 일으킬 때 성공한다.
당시 코치 신분으로 긴급한 상황의 연습과 작전의 모든 것을 기록했던 최진한 경남FC 감독은 “이탈리아전을 앞두고 선수 교체 작전의 수많은 경우를 검토하고 연습”했다고 기억한다. 4년 뒤, 호주 대표팀을 맡은 히딩크 감독은 4명의 공격수를 투입하는 교체 작전을 써서 일본을 대파했다. 당시 외신은 히딩크가 ‘위험한 갬블러였다’고까지 표현했다.
씁쓸한 교체 상황도 있다. 승리를 눈앞에 둔 팀이 시간 끌기 삼아서 늑장을 부리며 선수 교체를 할 때는 설령 저 지구 반대편의 나와 무관한 클럽 경기라 해도 그 선수가 안쓰러워 보인다. 패전 처리용으로 교체될 때는 더 마음이 아프다.
최근 들어 가장 가슴 아픈 선수 교체는 퀸스파크 레인저스의 박지성이다. 지난 1월30일, 런던 로프터스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맨시티와의 홈경기에서 박지성은 후반 43분께 투입됐다. 강호를 만나 무승부 직전까지 갔으니 선수 교체를 통해 단 몇 십초라도 시간을 벌기 위한 해리 레드냅 감독의 ‘작전’이었다. 박지성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홈팬의 야유를 받으며 그라운드에 들어섰다. 혹시라도 박지성이 공을 받으면 팬들의 야유를 더 받을 수 있다고 여겨서인지 동료들도 패스를 자제하는 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라운드 바깥에서도 ‘선수 교체’ 상황이 발생했다. 근래 보기 드문 경기력을 보여준 선수(노회찬)가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 때문에 경기장 바깥으로 나와야 했고 그 공백을 누군가 교체 투입돼 메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단 한번도 경기를 뛴 적은 없지만 그러나 누구보다 파괴력이 높을 것으로 짐작되는 선수(안철수)가 직접 경기를 뛰겠다고 밝혔다. 어느 정도 연고가 있는 부산 쪽에도 선수 교체 상황이 발생했는데 이왕이면 그쪽 그라운드에 출전해 본인의 경기력도 증명하고 야권 전체의 열패감도 씻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어느 경우가 아름다운 선수 교체인지, 사뭇 궁금해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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