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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이 자동차를 탔다.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과 사무총장 그리고 대변인. 누가 운전할 것인가. 정답은 ‘경찰’이란다. 이 농담을 확대해 보자. 택시가 아니라 대형 버스라고 해보자. 국제 축구계를 쥐락펴락해온 사람들이 대거 탑승하면 과연 누가 운전대를 잡을까. 이번에도 정답은 ‘경찰’이 되지 않을까.

지난 7일(한국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일간지 ‘선데이타임스’는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이 블라터로부터 100억원대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미국 검찰은 남아공 정부쪽에서 나온 거액이 잭 워너 전 FIFA 부회장과 2010 월드컵 개최지 투표권을 행사하는 집행위원 2명에게 건네졌다고, 공소장에 적시했다. 현재 미 검찰은 워너를 포함한 14명의 관계자들을 부패 혐의로 체포한 상태다. 남아공 월드컵과 관련해 벌써 버스 한 대가 꽉 찼다.

1974년부터 1998년까지 전 세계의 축구장을 ‘검게’ 물들였던 주앙 아벨란제 밑에서 사무총장을 하며 축구를 돈으로 바꾸는 계략을 보고 배운 블라터는 개최지 결정권, 중계권, 공공 전시권이라는 3종 세트를 활용해 축구장을 자기들만의 환전소로 바꿔왔다. 남아공 대회의 경우, 본선 대회 전까지 4년간 지역예선 중계권, 광고 수익 등으로 무려 4조2763억원을 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12억원의 중계권료를 지불했으나 2010년에는 700억원이 넘었다. ‘FIFA 파트너, 월드컵 스폰서, 내셔널 서포터’ 등으로 구분된 수십개의 글로벌 기업들이 FIFA를 위해 월드컵 기간 돈의 축포를 쏘아댔다.

그리고 공공 전시권! 블라터와 그 수하들이 스필버그나 잡스 같은 사람은 흉내도 못 낼 정도로 21세기 인류 최고의 상상가임을 입증한 수입원이다. 2002 한·일월드컵 때 온 나라의 거리와 광장을 가득 메운 열정을 보고 이들은 곧장 공공 전시권을 고안해낸다.

2인 이상이, FIFA의 허락 없이, 공공장소에서 월드컵을 시청하면 과태료를 물리겠다는 것이다. 극장, 역, 광장, 병원, 터미널 같은 장소에서 어떻게 과태료를 물리나, 농담이겠지, 난 안 봤소 걸어가던 중이오 하는 사람을 어떻게 적발하나. 이렇게 방심하는 사이 그들은 ‘팬페스트 광장’을 고안해냈다. 수백년 동안 개별 독립국가의 사람들이 모이고 떠들고 저항하고 웃고 즐기고 사랑을 나누던 광장을 그들은 순식간에 장악해 자신들에게 막대한 후원금을 낸 기업과 방송사만이 그 광장을 독점적으로 사용케 했다.

권력 장악의 타당성과 장기적인 안정을 노리는 부패한 정치인들, 축구의 열정에 배어 있는 땀방울을 마케팅이라는 용광로에 우겨넣는 기업들, 이들이 떠받치는 권좌에 앉아 개별 주권 국가의 고유한 법칙과 재정 원리를 일거에 무시해온 FIFA의 권력자들이 축구장을 검게 물들여 왔다.


이에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겸 FIFA 명예부회장이 나섰다. 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는 아니지만 서서히 군불을 지피는 초기 양상은 두루 확인된다. 그는 지난 5일(한국시간), CNN의 유명한 앵커 크리스티안 아만포와의 인터뷰에서 “블라터 회장은 당장 물러나고 일반 업무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한 후 “축구 관계자들과 만나 의견을 들어본 뒤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의견은 회의적이다. 세력 관계상 아시아계 후보가 당선되기 어렵다는 중론이다. 최근 3년간 FIFA 인사들과 교류가 적었다는 의견도 있다. 국내 선거에서 연거푸 좌절되면서 과거의 영향력을 많이 잃었다는 분석도 있다.

나는 이런 분석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있다. 블라터에 반대한다고 해서 곧장 개혁적인 후보인가 하는 점이다. 블라터 회장은 “나도 완벽하지 않고, 모두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 ‘모두’에 정 명예회장이 자유로운가도 검토해봐야 한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정몽준 후보는 “FIFA 책임자가 한국이 준결승에 오른 것은 MJ라는 놈이 축구 심판을 매수한 게 아니냐고 했다. 그 정도 되면 제가 능력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유세 과정의 실언이겠지만, 이런 인식이라면 반블라터 인사일 뿐, FIFA를 개혁할 만한 인사인가, 회의적이다.

물론 선거는 현실이다. 블라터의 말처럼 ‘모두’가 어느 정도 흠집이 있는 상황에서 평지돌출의 인물이 선거에 나서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정몽준 명예회장은 유력한 후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개혁 프로그램과 의지’다. FIFA 특유의 철저한 비밀주의를 깰 수 있는가, 최고 수준의 의사결정과 그에 따른 회계 및 운영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고 집행하는 의지가 있는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수십년의 ‘침묵의 카르텔’을 깰 수 있는가, ‘1국1표’의 비밀주의에 기반한 24인 집행위원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축구공을 빼닮은 열정적인 팬들의 순수한 눈망울을 모조리 돈의 단위로 치환해 버리는 상상력 자체를 근절해낼 수 있는가 등이 관건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프로그램과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정몽준 명예회장이 출마하기 바란다. 그러나 반블라터 깃발만 앞세운 채 어떻게 우군을 확보하고 적군을 공략할까 하는 공작적 자세라면 출마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는 당선되기도 어렵지만, 바로 그런 전략으로 당선되었기에 블라터는 몰락했다. 개인에게는 불운이요 축구계로서는 재앙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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