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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199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에릭 칸토나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로 유명하다. “갈매기가 고깃배를 따르는 까닭은 정어리가 곧 바다에 빠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같은 말이 그렇다. “생각의 질서를 타파해야 한다. 기존의 틀을 자유롭게 깨버려야 해” 같은 말도 칸토나가 자주 쓰는 말이다. 우리의 스포츠 저널리즘은 감독이나 선수들의 말을 ‘받아쓰기’ 하는 데 반해 유럽에서는 밤 늦도록 날선 토론을 하는 문화라서 이런 발언이 가능한 점도 있다.
아무튼 국내 팬들에게 칸토나는 ‘쿵후 킥’으로 유명하다. 1995년 1월, 그는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는 크리스털팰리스의 팬 매튜 심슨을 ‘응징’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가 쿵후 킥을 날렸다. 그 대가로 2만파운드 벌금, 징역 2주, 사회봉사 120시간, 9개월간 대표팀 및 소속팀 출전 금지 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칸토나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강펀치를 날리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 더 강하게 한 방 먹였어야 하는데 말이야”라고 그는 축구 전문지 ‘포포투’ 2008년 11월호 인터뷰에서 말한다.
그의 발언을 더 들어보자. “나는 그저 축구선수일 뿐이고 그 이전에 한 명의 남자라고. 내가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부류의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행동해야 해’라고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야.”
만약 국내 선수가 이같이 발언했다면 어떻게 될까. 소속 구단에서는 사과성명을 내고 안티팬들은 융단 폭격을 가하고 축구협회에서도 ‘엄벌’에 처하지 않을까.
마침내 이천수가 돌아왔다. 무려 1381일 만의 일이다. 2009년 6월20일 전북과의 경기 이후 국내외로 전전한 끝에 인천 유니폼을 입고 K-리그 클래식 그라운드를 다시 밟았다. 지난달 31일 인천 축구전용구장에서 열린 인천-대전의 4라운드 홈경기에서 그는 후반 7분에 교체 투입돼 남은 시간을 달렸다. 아쉽게도 1 대 2로 팀이 패배했지만, 이천수는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조금씩 웃음도 띠었다. 후반 11분, 상대 수비수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는데, 잠시 항의하는 듯하더니 이내 경기에 몰입했다. 경기 후 이천수는 “예전 같았으면 성질도 났었겠지만 이제는 운동장에서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축구 경기에서 울산 이천수가 레드카드를 받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2006년자료) :경향DB
이천수가 국내 리그에 복귀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신의 노력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전 소속 구단인 전남의 고심에 찬 결단 덕분이었다. 구단의 권위와 지도자의 명예를 뒤흔들어버린 선수이기는 했지만 끝내 주소지 불명으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축구화를 벗게 되는 비극만은 막기 위해 전남이 용단을 내렸다. 인천도 큰일을 했다. 김봉길 감독을 비롯해 김남일, 설기현 같은 선배들이 이천수를 품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전남 구단의 깊은 배려와 이천수의 회심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기를 충언해온 나로서도 그의 복귀로 마음 한구석이 울컥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틀림없이 이천수는 전남 구단과 당시 박항서 감독이나 하석주 코치에게 잘못했다. 이후의 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이참에 우리나라 스포츠 문화가 바람직한 선수상으로 여기는 정형화된 모습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극단적인 사례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라이언 긱스가 있다. 그의 동생 로드리는 긱스를 두고 “벌레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2010년,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긱스 불륜’ 파문 때 일이다. 긱스가 동생 부인과 8년 넘게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 일로 라이언 긱스의 체면은 쓰다 버린 이면지처럼 구겨졌지만, 경기 출전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전적으로 ‘그들의 사생활’이라는 게 현지의 반응이다.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 역시 어김없이 긱스를 맨 앞에 내세운다. 2012년 10월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연예 스타 패리스 힐튼과 함께한 클럽 영상이 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호날두 역시 건재하다.
멘체스터 유나이티드 긱스의 불륜사실을 폭로한 영국의 한 일간지 (경향DB)
나는 지금 이천수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다. 긱스나 칸토나처럼 경기장 안팎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치는 것이 ‘상남자’다운 행동이라고 강변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국내 스포츠 문화의 전형적인 이미지, 즉 ‘근면성실하고 타의 모범이 되며 겸손하고 봉사활동’도 잘하는 선수라는 이미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한 개인으로서 그 같은 능력과 덕성을 갖췄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그 정형화된 모습이 다양한 개성과 성향을 지닌 선수들을 옥죄는 그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특히 위계질서가 엄격한 스포츠 문화에서 ‘타의 모범’이라는 말은 순응이나 굴종의 다른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스포츠나 연예계에 과도한 도덕성의 올가미를 씌워 ‘국민을 순치’시키려는 지배문화의 문화지배 방식도 염려스럽다.
선수에게 필요 이상의 과도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분위기에 대해 나는 “경기장을 더럽히지는 않았다”는 마라도나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펠레가 최고냐, 마라도나가 최고냐 하는 논쟁에 대해 언젠가 마라도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저녁 10시만 되면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지만, 나는 새벽 5시까지 유흥을 벌인다는 점이 큰 차이다.” 나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선수는 마라도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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