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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선수가 되길 바라는 운동부 학생이 꼭 교실에 들어가야 되는가?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수업을 따라가기도 어렵고, 그래서 아마 책상에 엎어져 잠을 자는 수가 많을 텐데 굳이 교실에? 이렇게 또 반문해도 내 대답은 마찬가지다. 그렇기는 해도 일단 교실에 ‘들어가야만’ 한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현행의 학교 또 교실이 어떤 풍경인가를. 이른바 전인교육은 찾아보기 어렵고 결국은 바늘끝만 한 입시 지옥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 그래서 꽤 많은 학생들이 정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 채 잠을 자는 수가 많고 심지어 학업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도 부분적으로는 학원에서 맹진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다들 교실에는 들어간다. 운동하는 학생이라고 해서 교실 밖을 전전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거창한 교육적 가치나 숭고한 이념이나 적절한 현실적 이유 등을 다 떠나서, 오로지 단 한 가지 이유뿐이다. 기존의 온갖 스포츠 제도가 반강제로 강요하는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장기에 학교에서 고립되면 어른이 된 후 사회에서도 고립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러면 안된다. 한 인간이 운동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학교로부터 고립되고, 장차 사회로부터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이른바 ‘운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오해와 편견에 갇혀 살아서도 안된다. 수학을 조금 잘하는 친구들, 피아노를 조금 잘 치는 친구들, 과학을 조금  더 좋아하는 친구들. 그들은 모두 학교에 있다. 학교에서 여러 교과목을 배우면서 저마다의 진로 또한 준비한다. 그런데 왜 운동을 잘하는 친구들은 고립되어야 하는가.

나는 조재범 전 코치의 폭행 및 성폭력 사건을 비롯하여 숱하게 발생하는 스포츠계의 수많은 문제들은 이렇게 선수들이 어릴 때부터 학교와 사회라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부터 이탈하고 고립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학창 시절’에서 이탈한 선수들은 성인이 되어 ‘국가대표’라는 비좁은 통로로 들어가서는 점점 이 사회의 폭넓은 관계와 정서로부터 ‘고립’되고 만다.

오직 국위 선양의 국가주의 패러다임에만 몰두했던 수십년 한국 스포츠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이 ‘사회화’ 과정을 이루지 못했다. 반강제적인 ‘이탈’과 ‘고립’에 의하여 스포츠계는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리그에는 그 사회의 기본적인 상식이나 관념이나 정서가 스며들기 어렵다.

비록 현실의 학교가 부족한 구석이 많고 더러 비교육적인 파행이 벌어지는 곳이기는 해도 일단 교실에서 여러 친구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교육적이다. 잠을 깨워주는 친구도 있고 어울려 밥을 같이 먹는 친구도 있다. 성격도 다르고 희망도 다르고 감수성도 다른 친구들, 그 생활의 공동체 안에서 사람은 성장한다. 그렇게 하여 사회에 나왔을 때도,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이나 감수성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무엇보다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말’은 기본적인 언어 활동을 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집과 학교에서, 특히 ‘교실’에서 수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체득하는 것이다.

박찬호 선수는 미국에 진출했을 때 코치들이 쉼없이 자기에게 질문을 했고 자신은 그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만 반복했음을 떠올린 적 있다. 실은 잘못을 추궁한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던졌는가’를 질문한 것이고,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신들의 뜻을 자연스럽게 피력하는 모습에서 박찬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기성용 선수는 중학교 때 호주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의 또래 친구들이 심지어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거나 코치 선생님들과 팔짱을 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박찬호나 기성용 정도면, 이미 성장기에 출중한 기량을 드러냈을 텐데, 국내의 스포츠 ‘훈육’ 환경에서는, 스스로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스포츠야말로 생활 공동체에 긍정적인 기운을 확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포츠는 현대 사회의 거대한 고립을 해체하고 서로 능동적으로 섞여서 일상을 활기차게 만든다. 적극적인 신체활동과 교류는 날로 피폐해지고 고립되어 가는 현대적 삶의 불안을 치유한다.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 혹은 같은 종목을 선호하는 사람들끼리 스포츠를 통해 활력을 주고받으며 사회적 교류를 하는 것, 오늘날 한국 사회가 스포츠계에 바라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새로운 지도자상이다.

스포츠 문화를 ‘혁신’한다는 것은 폭행 및 성폭력의 조건을 개선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제도를 고쳐서 ‘고립’의 시대를 끝내는 데 있다. 이로써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편견이 씻어질 것이며 스포츠가 사회 공동체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각 종목의 지도자들은 ‘아이들을 교실로 들여보내자’는 나의 호소를, 여러 현실론을 근거로 얼핏 외면하기는 해도, 마음 깊이 공감하는 바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학교로부터 고립되고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몸소 체험했던 대다수 지도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제자와 자식들이 폐쇄된 위계질서에 편입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공동체에서 적절한 경제적 대우와 사회적 존중을 받았으면 하는 그 애틋한 마음들, 그것의 현실화가 스포츠계의 혁신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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