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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님, 안녕하신지요. 1년여 전 스포츠 전문 방송에서 대화를 나눈 적 있지요. 그날 방송에서 위원님은 IOC 선수위원의 임무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올림픽 헌장’을 준수하는 것과 선수 권익의 신장과 보호였지요.

사실 이 둘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올림픽 헌장’은, 마치 헌법처럼, 회원국의 모든 임원, 지도자, 선수들이 일체의 타협이나 양보 없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근본 이념이지요. 그 맨 앞에 ‘올림픽 이념의 기본 원칙’이 천명되어 있습니다.

1항을 보면 올림픽 이념은 ‘인간의 신체, 의지, 정신을 전체적 균형과 조화 속에서 고취’시키는 것입니다. 신체만이 아니라 의지도 정신도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선수들이 ‘운동 기계’가 아니라 전인적인 성장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음 2항, 올림픽 이념의 목표는 ‘인간의 존엄성 보존을 추구하는 평화로운 사회 건설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또한 6항에는 ‘어떠한 종류의 차별 없이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엄중한 ‘이념’에 따라 올림픽의 운영 항목이 열거되지요. 이를테면 1장 2조 ‘IOC의 사명과 역할’은, 위원님이 강조하신 선수 권익 보호 사항입니다. ‘스포츠 윤리 발전’ ‘남녀 평등’ ‘선수들의 의료 및 건강’ ‘선수들의 사회적, 직업적 미래 보장’ ‘스포츠를 교육 및 문화와 접목’ 등이 그것입니다. 이 가치들이 우리의 스포츠와 올림픽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지옥 훈련’이니 ‘혹사’ 같은 말들이 여전히 횡행합니다.

‘스포츠의 자율성 보존’이나 ‘선수들의 정치적, 상업적 남용 반대’도 2조에 천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막연하게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부당한 정치적 압력이나 지나친 자본의 위력으로부터 선수를 보호하자는 것입니다. 20세기 초엽에 스포츠를 정치 선전 수단으로 삼고 올림픽을 자본 이익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가 도처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정치와 스포츠의 분리’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지요. 모든 관계의 차단이 아니라 부당한 압력의 차단이 목적입니다. 50조에도 ‘정치적, 종교적, 인종차별적 시위나 선전 활동을 금한다’고 적시되어 있습니다.

위원님이 이런 가치를 모를 리 없겠습니다만, 최근 전개되고 있는 한국 스포츠의 거대한 전환 속에서 자칫 이 올림픽 정신이 오용되거나 극히 부분의 표현을 맥락 없이 남용하는 경우들이 많아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조재범 전 코치 가해 사건이 불거진 이후로 우리 스포츠계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상명하복식 위계질서와 유무형의 모든 폭력 문화를 근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민적인 열망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얻어맞고 심각한 인권 유린 상태에까지 내몰렸는데 그렇게 해서 따낸 금메달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호소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폭력 실태를 엄중히 조사하는 한편 국위 선양과 성적지상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종 개혁 과제를 전개하겠다고 밝혔지요.

이에 스포츠 현장에서는 한편 공감하면서 또한 우려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여러 국제대회를 앞두고 구슬땀을 흘리는 선수들이 당혹해한다는 얘기도 있고 당장 2020 도쿄 올림픽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막막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유승민 위원님도 의견을 피력했지요. 며칠 전 위원님은 “체육행정가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개혁이 필요하지만, 합숙·연금 제도를 폐지하는 건 능사가 아니다. 올림픽을 목표로 땀 흘린 선수들의 꿈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선수들의 의견을 듣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개선안을 찾자고 제안도 했습니다. 금메달리스트이자 선수위원으로서 충분히 제시할 만한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당혹감에 빠진 후배 선수들을 보호하려는 마음도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위원님은 단순한 체육행정가나 경기력 강화위원이 아니라 ‘올림픽 헌장을 준수하고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선수위원입니다. 선수들이 폭력의 무한 재생산 구조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몇몇 지도자의 일이라고 치부한다면 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와중에도, 연세대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감독으로부터 ‘동물 학대 수준’으로 지속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다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선수위원이라면 지금 당장 폭력을 멈추라고 호소해야 하며 공포의 상황에 놓여 있는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인 행동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악을 근절하고 선수들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천명하고 있는 올림픽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올림픽 헌장에 제시된 바와 같이 ‘선수들의 사회적, 직업적 미래 보장’ 또한 유 위원님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메달리스트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미래가 보장되는 현행의 제도는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요?

개혁 과제들이 매우 복잡해 하루아침에 대한체육회가 해체되거나 선수촌이 폐쇄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이 유일무이한 해법도 아닐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 권익 보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의미의 ‘권익’이 아니라 보편적 ‘권리’여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라는 이념으로 ‘올림픽 정신’에 천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지켜진다면 그 밖의 여러 제도 개선은 얼마든지 다양한 해법이 가능하지요. 우리의 스포츠 개혁과 발전은, 유 위원님의 활동 근거가 되는 고결한 ‘올림픽 정신’의 실천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선수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 ‘권익’이 아니라 그 ‘존엄성과 인권’을!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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