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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정가에서는 ‘무대’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무성 대장’이라고 무슨 조폭들처럼 불러왔는데 이를 줄여 부르다보니 ‘무대’라는 별칭이 생겼다고 한다. 한번 결심하면 밀어붙인다고 해서 ‘무대뽀’의 무대라는 얘기도 있다. <수호지>에 나오는, 어리숙하고 실속 없는 무대라는 인물을 빗댄 말이라고도 하는데 그동안의 정치 이력으로 볼 때 김 대표가 제 잇속도 챙기지 못하는 어리숙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방송 카메라가 즐비한 가운데 일국의 국방부 장관에게 책상을 두드려가며 모욕을 준 인물 아니던가. 특히 지난 1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 발언을 보면, 별칭대로 김 대표가 ‘무대뽀’이거나 아니면 늘 세상을 아래로 굽어보는 ‘대장 놀이’에 익숙한 정치인임을 알 수 있다.

전후 사정은 이렇다. 이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씨름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방안 1차 포럼’이 열렸다. 여기에 김 대표가 축사를 하러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승한 대한씨름협회장이 “입씨름 많이 하시는 것보다는 씨름대회를 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면 어떤가. 대한씨름협회에서 심판을 보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에 김 대표가 발끈해 “씨름인 여러분한테 조롱거리가 되는 것에 대해 참 기가 막힌다”고 했다.

이 보도를 접하고 나는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씨름협회장의 발언은 ‘조롱’은커녕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농구협회장이라면 “어려운 문제, 3점슛으로 해결합시다”라고 할 수도 있고, 바둑협회장이었다면 “서로들 바쁜데, 알까기라도 해서 결론냅시다”라고 할 수도 있다. 파벌 싸움과 금품 비리로 얼룩졌던 그동안의 씨름협회 사정을 돌이켜보건대 씨름인들이 성난 민심을 전달해야 되겠다고 결심할 만한 근거도 희박하다. 내가 만약 김 대표라면 “내 몸집도 여기 계신 왕년의 천하장사 분들 못지않은데, 이 세미나실에는 모래가 안 깔려 있으니 다음에 한번 합시다” 하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왜 김 대표는 발끈했던 것일까. 게다가 “중국한테 (씨름의) 유네스코 등재를 뺏기는 상황에 오는 동안 여러분들은 뭐 하셨느냐”라고 질타까지 했다. 과연 씨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유네스코 등재 실패의 위기에 대한 안타까움을 진실로 표현한 것일까.

나는 ‘감히 씨름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권위주의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짐작이 아니라 그의 말에 들어 있다. 현장 기자의 꼼꼼한 메모에 따르면, 김 대표는 “우리 국회의원들이 우리 국회 회의장에서 씨름인 여러분들한테 조롱거리가 되는 것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는 40대 이상의 한국 남성들이 흔히 쓰는 동류의식의 강한 표현이다. 직장인들이 점심 때, 메뉴를 고르다보면, 40대 이상의 과장·부장들 입에서 ‘우린 그런 거 잘 안 먹지’ 하는 표현이 어김없이 나온다.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말은, 남성들, 특히 남성 정치인들이 선호한다. 1997년 대통령 후보 토론 때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후보에 대해서까지 ‘에, 존경하는, 우리 김대중 후보는…’이라는 식의 표현까지 쓴 적 있다. 남성 정치인들의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 단적으로 드러난 예다. 더욱이 김 대표는 ‘국회의원들이 국회 회의장에서’ 조롱거리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마 국회 바깥이었다면 뒤틀린 심사를 이런 식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우리 국회의원들이 우리 국회 회의장에서 조롱을 받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이 순간 국회라는 공간은 민심이 수렴되는 곳이 아니라 전업 정치인들의 개인 사무실로 전락한다.


▲ 씨름협회장의 인사치레에
‘감히 씨름하는 사람들이’라며
발끈한 새누리 김무성 대표
권위적인 ‘무대뽀’가 아닐까


정치인들은 그동안 씨름인을 포함해 수많은 스포츠 종목 종사자들을 손안의 공깃돌처럼 여겨왔다. 축구나 야구 같은 유력한 인기 종목은 물론이고 이른바 비인기 종목까지 정치인들의 위세가 실핏줄처럼 퍼져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비인기 종목 단체들은 대기업 회장이나 유력 정치인을 회장으로 ‘모시는’ 것에 사활을 걸기도 했다. 협회 운영을 위한 재원 마련이나 제도 개선 같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그러나 협회 임원들의 노골적인 권력지향성이 더 컸다. 유력 정치인들에게 줄을 대서 협회 안팎에서 자신의 권력 행사를 용이하게 하려는 작태도 많았다. 정치인들 역시 경기단체 회장을 맡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일삼아왔다. 상시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알릴 수 있을뿐더러 이를 파이프라인으로 해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유력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스포츠 스타들을 병풍처럼 세웠고 이에 체육인들은 그런 행태가 비굴한 것인지도 모르고 여기저기 우루루 몰려다니며 권력의 한 터럭에라도 연줄을 대려고 해왔다.

물론 김 대표와 현 씨름협회 집행부의 관계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수십년 동안 한국 스포츠가 존립해오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을’의 위치에 있는 체육단체와 유력 정치인들의 ‘악어와 악어새’ 관계를 생각하건대, 김 대표로서는 ‘감히 우리 국회에서 씨름인한테 조롱을 받다니’ 하고 발끈한 것이다. 정치와 체육의 심각한 불평등 관계에 더하여 김 대표 본인의 강한 권위의식이 합쳐져 이 같은 발언이 터져나온 것이다.

김 대표는 문제의 발언을 행한 지 이틀 뒤 마포구 상암동 한강공원에서 열린 ‘희망나눔 철인 3종 경기 대회’에 참석했다. 사전에 약속된 일정이겠지만, 자신의 발언에 대한 체육계 안팎의 여론을 무마하는 데는 썩 절묘한 정치행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무대’라는 별칭이 <수호지>의 어리숙한 인물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얘기다. 권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무대뽀’의 ‘무대’라면 모를까.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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