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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숨결, 아시아의 미래”,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다.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지 않은 한반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대도시로 성장한 인천에서 ‘평화의 숨결’을 확산시키겠다는 의지, 딱 들어맞는 슬로건이다. 나아가 45억 아시아인의 전쟁과 갈등을 치유하고 평화로운 아시아의 미래를 염원하는 의미의 슬로건으로 이해한다. 아시아인의 평화와 우정을 나누는 대제전이니, 다들 최고의 대회로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 한결같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어색한,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북측 응원단이 참관하지 않은 경기가 이어지면서 이 대제전의 감동의 농도는 묽어지고 있다. 200여 선수단의 참가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응원단이 빠진 북측 참가 경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북측 참가 경기 그 어디서도 ‘미녀 응원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평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인천, 그 경기장에 응원단 없는 북측 선수들의 경기를 보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각각 3개, 1개의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북한 역도의 힘을 과시한 김은국과 엄윤철의 경기에 환호하는 북측 응원단은 없었다. 참가국들 대부분의 경기에, 심지어 네팔 같은 작은 나라 응원단의 목소리도 경기장 어디에선가 들리는 데 말이다.

몇 년 후 평양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린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남측 응원단 목소리가 단 한 군데서도 들리지 않는 평양의 경기장들을 상상해 보자. 남북 축구팀이 능라도 경기장에서 결승전을 치르는데, 남측 응원단 없이 일방적으로 북측 응원단의 함성만 들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때 남측 국민들이 갖게 될 참담한 심정은 어느 정도일까? 아시안게임을 주최하는 평양 주민들은 어떤 마음을 가질까? 가장 비정치적인 체육행사에 남북의 응원단이 어울리지 못하는 상황을 바라보는 아시아인들은 한반도 구성원들을 어찌 생각할까? 응원단 내왕조차 못 시키는 남북 최고당국자들을 어떻게 볼까? 역지사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24일 인천 달빛축제정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 여자역도 68KG급에 출전하는 북한의 려은희를 응원하기 위해 엄윤철등 동료선수들이 경기장을 찾아 인공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은 1986년 서울, 2002년 부산에 이어 한국에서 열리는 세 번째 대회다. 냉전시대, 남북한의 대결시대에 개최된 ‘86아시안게임’에는 북측이 아예 불참했다. 하지만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부터 북측 선수단의 참가와 응원단의 참관이 이뤄졌다. 부산 아시안게임 이후 12년이나 지난 지금, 북측 응원단의 불참은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가장 비정치적이고 인도적인 아시아인의 대제전에 북측 응원단 초청을 성사시키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의 남북관계 관리 능력이 아쉽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남북관계 관리 능력 역시,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씁쓸하다.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2005년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등 세 차례 북한 응원단의 남한 방문 기억을 떠올려 보자. ‘미녀 응원단’의 방문으로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회자되고 남북관계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는지 회상해 볼 필요가 있다. 스포츠 교류와 응원단 참관이 가져다주는 무형의 성과는 값으로 따지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단 한차례 열린 이산가족 상봉을 제외한 거의 모든 관계가 꽉 막혀 있는 지금, 미녀 응원단의 참관이 남북관계 분위기를 바꾸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크다. 미녀 응원단의 참관은 인천 아시안게임 흥행을 위해 반드시 이뤄졌어야 했다. 남북 실무회담 결렬로 북한 응원단이 인천 땅을 밟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남북 최고당국자가 최소한의 비정치적, 인도적 차원의 응원단 참관 현안조차 풀지 못한다면, 남북관계 개선은 대단히 어렵다.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 북측 응원단 불참이 가져다주는 교훈이다.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금강산관광 재개 등 남북 간 현안이 전혀 풀리지 않고 있다. 상호간 불신을 바탕에 깐 샅바 싸움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다. 남북관계의 교착상태가 상대방 탓이라는 논리는 남북한에서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 이러다간 올해를 넘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그동안 쌓인 현안들부터 풀어내는 남북 최고지도자의 통 큰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평화의 숨결’이 한반도 구석구석에 퍼져 ‘아시아의 미래’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북관계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거둬내는 이 가을을 기대한다.


김용현 |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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