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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고 했던가. 브라질월드컵의 쓰라린 패배 이후, 한국 축구계가 마침내 낡고 닳은 외양간을 고치기 시작했다.

우선, 엘리트 축구와 생활 축구로 극단적으로 양분된 한국 축구의 생태계를 단일한 우산 아래에 재구성하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대한축구협회와 한국생활체육전국축구연합회로 양분된 현 체제를 ‘1종목 1단체’로 통합하되 그 방법과 시기를 전담할 태스크포스(TF)를 문화체육관광부(문화부), 대한체육회, 축구협회, 프로축구연맹, 생활체육전국연합회 등의 인사들로 구성한 것이다.

문화부 체육국장을 비롯하여 각 기관의 부회장, 사무총장, 기술위원장 등 축구 행정에 관한 한 막강한 권한을 지닌 인사들이 참여했다.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장관은 물론 각 기관의 상징적 인물인 회장을 제외하고 보면 이들이 업무의 지속성과 실질적 권한이라는 측면에서 최고 파워맨들이다. 나는 십수년 동안 문화와 스포츠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숱한 TF를 겪었지만 이만큼 막강한 인사들로 구성된 팀을 본 적이 없다. 만약 일이 어긋날 경우, 당연히 이 최고 책임자들은 견책을 받아야 한다. 그 정도로 비상한 책임감으로 축구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들기를 바란다.

다음,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이용수 교수가 취임했다. 내친김에 축구협회의 정관을 미래지향적으로 고치는 일도 필요하지만, 급한 대로 적재를 적소에 선임했다는 점에서 반갑다. 기술위원회의 목적과 기능에 대한 축구협회의 정관은 모순적이다. 적극적 관점에서 보면 각급 대표팀의 기술 발전과 감독 및 선수 발굴에 있어 막강한 권한이 있지만 소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보 제공이나 자료 협조 수준으로 전락하기 쉽다. 기존의 기술위는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급변하는 축구의 미래를 탐사하는, 그런 인적 수준도 되지 못했고 공적 헌신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아예 그러한 욕망 자체가 없어 보였다.

이용수 위원장은 축구계 안팎에서 두루 신망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누구와도 격의 없이 호형호제하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다. 원만하고 소탈하지만 어떤 계략을 품고 인간관계를 복잡하게 형성하는 경우는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그것은 축구계 안팎의 복잡한 인간관계에 대한 하소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축구가 정녕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대승적 발전 방향을 찾아내기 위해서이다. 그런 점에서 이용수 위원장의 날카로운 진단과 합리적인 해법을 기대한다. 무엇보다 현대 축구의 패러다임 변화를 분명하게 밝혀내되 축구의 역사성, 사회성, 문화성까지 두루 살펴 한국 축구가 ‘월드컵’이라는 섬에 고립되지 않도록 해주길 바란다.


▲ 일부 스타들을 제외하면 열악한 고용환경 내몰려
비정규직 지도자 노조 이어 선수 노동자도 노조 필요


이상의 변화와 더불어 반드시 평가할 만한 일은 ‘한국축구인노동조합’이 출범한 일이다. 초·중·고교의 축구 지도자 76명을 중심으로 축구인노조의 법적 당위성과 현실적 필요성을 열렬히 검토하여 지난 17일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조 신고필증을 교부받았다. 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 부회장까지 역임한 이회택씨가 초대 노조위원장을 맡기로 했다는 소식도 흥분되는 일이다. 축구계를 통틀어 산전수전 다 겪은 진짜 축구인으로 이회택씨와 견줄 만한 인물이 한둘 정도 있을까 말까 하다. 그 정도로 최상급 인물이다. 메시처럼, 그 역시 결심만 하면 충분히 판을 뒤흔들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축구 지도자는 홍명보나 황선홍만 있는 게 아니다. 왕년의 스타였거나 프로 출신이지만 초·중·고교의 지도자로 묵묵히 터전을 닦고 있는 사람들이 숱하다. 그들의 ‘노동 조건’은 매우 열악하고 비인간적이다. 100만원 남짓한 월급으로 어렵게 생활하는 지도자가 한둘이 아니다. 정규직 교사와 달리 이들의 신분은 학교장의 권한에 손쉽게 휘둘리는 비정규직이다. 유망주 육성을 위한 장비, 기술, 연습 등에 필요한 거의 모든 비용을 학부모들이 감당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폭력, 승부조작, 금품 수수 같은 일도 발생한다. 착하고 성실한 지도자 개인이 이겨낼 만한 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축구인노조가 탄생했다. 취임 일성으로 “축구 인생의 마지막 봉사”라고 밝힌 이회택 위원장의 곧은길을 걷는 강직함을 노조원들과 함께 축구 지도자들의 파괴된 일상을 회복해내기 바란다.

이상의 일들이 지난주에 급속히 전개되었다. 그야말로 한국 축구의 환골탈태, 즉 시스템의 대변혁이 예고된 것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축구선수노동조합’이다. 오래전부터 이에 대하여 강조하여 왔으나 반향은 적었다. 구단과 개별적으로 한시적 계약을 맺는 ‘선수’라는 신분 및 협회, 연맹, 구단에 비하여 열등한 위치에서 분열되어 있는 ‘을’이라는 조건이 노조 결성을 어렵게 해왔다. ‘노조’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과 두려움도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늦출 수 없다. 스타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열악한 현실과 불안한 고용 환경에 내몰려 있다. 아니, 열마디 말이 필요 없다. 문화부에도 노조가 있고 대한체육회에도 노조가 있다. 축구협회에도 노조가 있으며 이제 지도자들도 노조를 결성했다. 그런데 정작 ‘몸’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의 결사체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선수들의 우람한 결사체, 곧 ‘한국축구선수노조’가 출범할 때 비로소 한국 축구의 외양간이 완벽하게 고쳐질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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