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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끝나고 비가 왔다. 이토록 멀쩡하던 공중에서 비가 오다니! 비가 와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비는 누구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온다. 우리말의 닿소리 비읍(ㅂ)은 작은 사다리 같은 것. ‘봄비’에는 그 사다리가 두 개나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러니 지금 봄비를 맞으며 이은하의 ‘봄비’를 읊조리는 이는 빗줄기를 잡고, 아니 사다리를 짚고 그 어디 하늘가로 닿는 중이기도 하겠다.

가느다란 봄비는 이제 곧 나무의 천하를 더욱 싱그럽게 바꾸고, 산은 물론 우리 사는 세상까지도 바꿀 태세다. 이는 저들이 지난가을에 이미 시범을 보인 바이기도 하다. 투표하듯 잎을 일제히 떨군 덕분에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수 있었다. 모처럼의 후련한 빗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히더니 작년 이맘쯤의 유쾌한 기억 하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날 나는 제주에 있었다. 꽃산행을 왔다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 한라산 쪽을 보았다. 산에서 비를 맞이하는 것과 비를 맞으며 산에 가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문득 번개 같은 궁리 하나가 떠올랐다. 누가 글 읽는 소리인가. 떨어지는 저 빗줄기. <논어>의 한 문장으로 생각해야겠구나!

때 묻은 나의 일생도 어느덧 보따리 쌀 준비를 해야 할 때. 그 굽이굽이에서 겪어야 하는 사연들이 적확하게 논어의 문장들과 궁합을 맞추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뒤늦게 저 고전에 푹 빠져들던 무렵이었다. 빗줄기를 논어의 한 문장으로 생각하기로 한 이후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다. 세상은 어쨌든 비가 오거나 맑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 비 오는 날에는 빗줄기에 실어서 논어 생각, 맑은 날엔 햇빛에 얹어서 논어 생각.

그날 잠시 비가 긋기를 기다렸다가 곶자왈로 갔다. ‘곶자왈’이란 지명이 주는 다소 특별한 공명을 생각하면서 관찰한 건 상산이었다. 한 일생을 요약한 듯 줄기에서 뻗어나온 가느다란 가지에는 잎과 꽃이 어울렸다. 은은한 향기가 주위에 진동하였다. 가지 끝으로 달려가며 팍 터지는 꽃망울은 배움에 들떠 책보 메고 뛰어가는 학동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상산, 운향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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