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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아이가 게임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은 있을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가 먼저 숙고해야 할 것이 있다. 왜 아이는 그렇게도 게임에 몰두하는가? 글자 그대로 게임은 놀이이기 때문이다. 호이징하(Huizinga)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간이 얼마나 놀이에 매료되는지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놀이의 어떤 특성이 인간을 그렇게 사로잡는 것일까. 노동과 대조했을 때 놀이는 자신의 특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철학적으로 노동은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불일치한 것으로, 놀이는 반대로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음주는 놀이일 수 있지만, 직장 상사와의 회식자리나 아니면 거래처 사람과의 회식자리에서 음주는 노동일 수밖에 없다. 친구 사이에서 음주 행위는 그 자체로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지만, 업무상 이루어지는 음주 행위는 술이 수단이고 친밀한 관계 확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놀이를 좋아하고 노동을 싫어하는 법이다. 어느 누가 거래처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이 경우 음주는 고통스러운 노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호이징하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 그러니까 놀이하는 인간으로 정의내린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인간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동을 지향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제 게임에 몰두하는 아이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게임을 놀이가 아니라 노동으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예를 들어 10만점의 점수를 얻어야 밥을 준다고 어머니가 제안하는 것이다. 이 순간 게임을 하는 행위는 밥을 먹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당연히 게임은 이제 곤혹스러운 노동이 된다. 아니면 지금부터 하루에 5시간씩 반드시 게임을 해서 프로게이머가 되어야 한다고 아이에게 주문해도 좋다. 이전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에 몰입했던 아이도 5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연신 시계를 쳐다보게 될 테니까.


지금은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가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 지배하고 있는 불행한 시대다. 이제 돈이 모든 행위의 지고한 목적, 거의 유일하기까지 한 목적으로 신격화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를 몰입시켰던 놀이의 영역은 점점 더 줄어들어가고 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책이 아니라 교재를 읽기 시작한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마치 게임처럼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했던 독서는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위인 반면, 학교나 학원에서 교재를 읽고 암기하는 행위는 더 좋은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목적에 종속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고등학교 공부가 입시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고등학생들은 젊은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고달픈 지적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하루빨리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지 않으면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놀이는 좋아하지만 노동은 싫은 법

자본의 논리에 대학이 죽자

논문은 지적놀이가 아닌 노동이 되고 스펙·상품이 돼버렸다”


대학 입학이 목적이기에 대학 측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요구하는 것들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학업 성적 증명서, 기타 과외 활동 증명서, 그리고 수학능력 시험 성적 증명서만 갖추면 된다. 이런 증명서들이 입시를 결정하기에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이 동원될 여지가 생긴다. 해당 과목에 흥미가 없거나 들키지 않고 부정행위를 하더라도 성적만 좋으면 된다. 과외 활동에 별다른 열의가 없거나 심지어 실제로 하지 않았더라도 과외 활동을 했다는 증명서만 있으면 된다. 흥미로운 일 아닌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어 그 틈이 더 크게 벌어질수록, 그만큼 비리와 편법이 침입할 수 있는 개연성은 더 커지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정당한 목적이라도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주장일 뿐이다. 공부를 지적 놀이가 아니라 지적 노동으로 변질시키지 않았다면, ‘정당한 수단’이란 말 자체가 나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지적 놀이의 공간을 제공했던 대학이나 대학원마저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취업이란 절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 대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학과를 평생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지적 놀이의 장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전공 영역은 고소득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학에서 전공과정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학문 영역, 그러니까 지적 놀이여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대학에서 독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이 탄생할 수 있는 법이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밤을 새워가며 공부에 몰두했을 때 어떻게 창조적인 지성인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마 지적 놀이에 몰입했던 대학생은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대학원이란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재미있었던 공부와 연구를 학부 과정 동안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는 일이니까.


지적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논문과 학위는 하나의 결과물, 그러니까 놀이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논문과 학위는 기쁨의 대상이기는커녕 심지어 슬픔의 대상이기까지 하다. 논문을 쓰고 학위 과정을 마치는 순간, 그래서 마침내 대학이나 대학원을 떠나는 날, 그들은 자신을 매혹시켰던 놀이 영역과 작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시간을 추억으로 넘기는 것보다 슬픈 일이 또 있겠는가. 그렇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작으나마 존재했던 지적 놀이의 장으로서 대학은 사실상 거의 죽어버리게 된다. 지적 놀이의 결과물에 불과했던 학위가 숭고한 목적으로 승격해버린 것이다. 물론 논문이나 학위가 이렇게 신격화된 이유로는 학위가 일종의 스펙으로 기능한 풍조도 한몫 차지한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자본주의 논리에 편입된 대학 측이 학위를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이라고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명문대부터 별로 알려지지 않은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학의 대학원 과정을 들여다보라. 얼마나 기묘한 대학과 대학원 과정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용이하게 학위가 매매되는지를. 학위를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불문율을 믿고 입학은 했지만, 지적 놀이가 아니라 지적 노동으로 논문을 쓴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업료 등으로 지출한 비용을 생각하면 논문 작성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마침내 논문 표절과 대필이 성행할 수밖에 없는 조건은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아예 논문 표절과 대필 문제는 연례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다. 이 와중에 정당한 수단만이 가치 있다는 원론적인 논의나 엄격한 논문 검증 방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도처에서 들린다. 그렇지만 논문 표절과 대필 사건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식은 자본에 맞서서 놀이가 가져다주는 창조적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자발적인 행동 앞에서 대필이나 표절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발을 붙일 수조차 없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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