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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生老病死)! 불교에서 인생은 이 네 글자로 간단히 요약된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난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이 네 가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불행하고 궁핍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우리 삶이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생로병사 사이에 벌어지는 다채로운 일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도 하고, 여행도 떠나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음악도 듣고, 스포츠도 즐기고, 직장에서 일을 하고, 책도 본다. 그럼에도 불교에서는 왜 생로병사로 삶을 요약한 것일까. 그것은 생로병사가 우리 삶의 행복을 위태롭게 만드는 하나의 한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생로병사에 맞닿아 있는 순간, 우리에게 삶 자체를 향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누구나 겪는 생로병사의 경험이 최근에는 동일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병원이다. 그렇다. 우리는 병원에서 태어나고, 늙거나 병들면 병원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병원에서 우리는 기구한 운명을 마무리한다. 한쪽에서는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났다고 환호하고, 다른쪽에서는 수술실 앞에서 가족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쪽에서는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유족들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이곳이 바로 병원이다.


생로병사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먼저 개구리나 벚꽃 아니면 병아리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가진 생명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다. 이런 한계에 직면할 때, 그러니까 태어나거나 늙거나 병들거나 아니면 죽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한계와 맞서야만 한다. 그 누구도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생로병사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의 고독한 싸움은 덜 외로울 수도 있다. 병원은 생로병사가 펼쳐지는 거대한 극장인 셈이고, 그곳의 의료진들은 우리의 생로병사를 지키는 동반자였던 셈이다. 고마운 일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에 직면하여 두렵고 외롭기만 할 때, 우리는 병원에서 그나마 작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니 말이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겪게 될 고통과 불안도 병원 의료진이 떠안는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환자가족에게는 친구보다 더 위로가 되는 곳, 가장 약해질 때 우리에게 힘을 주는 곳, 그래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곳일 수밖에 없는 곳, 그곳이 병원이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지금 어느 누구도 병원을 그런 소망스러운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생로병사의 고통에 동반자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친절하고 더 편안한 동반자를 찾으려면, 우리는 그에 상당한 돈을 의료비로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자본은 이익이 남는 곳이라면 동물적인 감각으로 찾아내는 법이다. 병원에서도 자본은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배가 너무나 고파 굶어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에게 사과 하나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 당연히 생로병사에 고통받고 불안한 사람에게 천금인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그래서일까. 지금 자본은 우리의 생로병사에서 이윤을 얻으려고 한다. 제약회사, 병원 경영자 등 의료자본가들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제약회사의 해묵은 리베이트 관행, 의료진에게 직간접적으로 강제되는 과잉진료 관행이 생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 피해는 모두 생로병사에 신음하는 우리 이웃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병원은 생로병사가 펼쳐지는 극장…

의료진은 고마운 동반자이지만 의료자본가는 돈만 좇아서 움직여

‘공공의료기관 폐업’ 맞서 싸워야”


다행히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의약품, 새로운 진단 기술, 그리고 새로운 수술 장비 등이 여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거대한 부가가치를 위해 움직이는 의료자본을 반기지 않을 리 없다. 그 정도쯤 구매할 자본은 충분히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몇 %나 될까. 대다수의 우리 이웃들에게 그런 고가의 의료서비스는 말 그대로 언감생심의 일일 뿐이다. 물론 의료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더 큰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새로운 의료 생산물들을 만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의료 서비스는 언젠가 일부 부유층을 넘어서 가난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른바 ‘트리클다운(trickle-down)’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회 부유층이 더 부유해지면,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어 그 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혜택으로 주어진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트리클다운 효과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이해를 돕기 위해 바우만(Zygmunt Bauman)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지만 그와 같은 ‘트리클다운’ 효과는 설령 그것이 과거 어느 곳에서는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최근에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엘리트 집단이 더 부유해지는 것과 공동체 전체의 삶이 더 안전하고 건강해지는 것 사이의 연관관계는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는 이런 정치적 선전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최근에 번역된 그의 새로운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 ‘건강 불평등(health and inequality)’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트리클다운’ 효과를 신뢰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의료민영화다. 그러니까 이윤이란 자본주의 논리를 의료 영역에도 관철시키자는 것이다. 그를 통해 새로운 의료산업이 발전한다면, 그 결과 새로운 고용 창출과 질 좋은 의료 서비스 제공 등 장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시 정치가들의 정치적 레토릭이 전가의 보도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마치 의료민영화는 사람들이 의료에 참여하는 따뜻한 정책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의료자본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참여정부를 표방했던 노무현 정부 시절, 그러니까 2003년부터 의료민영화가 본격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를 자처했던 당시 정부가 트리클다운 효과를 맹신하고 있었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 진주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다. 이번 사태는 의료민영화라는 보수적 정책을 그 문맥에 놓고 보아야 그 본질이 드러나는 법이다. 디테일에 속아서 구조적 본질을 놓쳐서는 안될 일이다. 당신은 자본의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우선시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공공의료기관을 폐업하려는 시도 자체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돈이 없다고 병원에 가지 못하는 환자와 가난한 환자를 거부하도록 강요받는 의료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병원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의 고통이 펼쳐지는 곳이고, 그만큼 가장 많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곳이다. 이곳을 무시하고 어떻게 복지를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아니라 자본의 편을 들고서도 어떻게 우리 사회가 복지라는 공동체적 이념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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