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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9일자 지면기사-
이영선 전 청와대 행정관이 2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재판부가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피고인의 지위나 업무 내용을 고려하면 무면허 의료행위를 청와대 내에서도 받으려는 대통령의 의사나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인 책임은 대통령 자신에게 있는 만큼 피고인에 대해선 비난 가능성이 낮다.” “차명폰을 제공한 것 역시 대통령의 묵인 아래 안봉근 전 비서관 등 상관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언뜻 이러한 판결은 법원이 엄격한 법 적용을 통해 힘없는 개인을 보호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달리 보면 법원이 조직 사회를 인준해준 셈이다. 조직이 부당한 요구를 해도 자율성이 없는 말단 개인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고, 설사 불법적인 일을 수행한다 해도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그러니 조직에 속한 말단 개인은 앞으로 상관이 부당한 지시를 해도 의문을 품거나 저항하지 말고 무조건 충성하라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다. 한국 사회에서 말단 개인은 조직의 한 기능에 불과하다는 거다. 조직은 곧 우두머리이며 말단 개인은 우두머리의 항존(恒存)에 복무하는 기능이다. 우두머리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말든 걱정 말고 그냥 하던 습속대로 해라. 지난 대통령 탄핵 청문회에 나온 말단 개인이 떠오른다. 아무런 감정 없는 사이보그처럼 모르쇠를 되풀이하던 조 대위.
말단 개인은 왜 자율적으로 행위하지 않는가? 그건 그가 속한 조직이 개인의 자율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율적으로 행위했다가는 조직에서 미운털이 박히고 왕따를 당하고 심지어는 잘릴 것이다.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들어간 조직인데 이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율적인 행위자가 되려 하겠는가? 조직 안에서 말단 개인은 자율성을 잃는 대가로 안정된 생존을 얻는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이러한 조직 사회의 습속이 합법적이라고 은근히 추인해주었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 사법부가 조직 사회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법시험을 보고 같은 사법연수원에서 함께 어울리면서 자신들만의 공유된 감정을 만든다. 주로 성적에 따라 판사, 검사, 변호사로 갈리지만, 한 번 맺은 이 연대 감정은 영원하다. 만나면 일단 기수를 따지고, 막내는 까라면 무조건 까야 한다. 최근 널리 드러난 검찰의 밥 총무 습속만 해도 그렇다. 식사 시간이 되면 막내 검사는 부장검사나 선배 검사들의 참석 여부를 일일이 확인한 뒤 메뉴를 정해 식당을 예약하고 식사를 마치면 미리 모아 관리하고 있던 돈으로 계산한다. 법원도 더 열악하면 열악했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비민주적인 습속을 지닌 조직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현실. 이게 어찌 사법부만의 일일까? 거의 모든 조직에서 개인은 대개 말단 조직인 취급을 받는다. 기업의 근무 습속만 해도 그렇다. 내가 연구과정에서 만난 한 지방대 졸업생의 근무 경험을 보자.
아침에 제일 일찍 회사에 가서 문을 열어야 했다. 청소도 해야 했다. “아침마다 사장님 방에 가서 쓸고 닦고 하고 사장님 올려놓은 컵 같은 거 씻어 놓고 물 받아 놓고 이런 거 다 했어야 했고.” 점심도 직접 해 먹어야 했다. “거기서 밥도 점심밥도 다 저희가 해 먹었거든요. 급식 당번이 있었는데 뭐 부장님이나 과장급은 안 하고 저나 대리님들까지는 일하다가 중간에 내려가서 밥하고 또 설거지도 다 해야 되고. 저는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어요, 중소기업에서는.”
이 사례는 기업이 사회 초년생을 조직의 부당한 습속에 따라 살아가도록 강제한다는 사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업무와 무관한 일을 하라는 조직의 부당한 요구를 원래 다 그렇게 하는 걸로 당연시하도록 만드는 습속. 이에 도전하면 조직에서 쫓겨난다. 바로 이러한 조직 사회의 습속이 우리 사회에 이영선과 조 대위를 만들어낸다. 잊지 말자, 악한 조직 사회에서 개인이 좋은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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