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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환상 없는 성찰

opinionX 2018. 1. 23. 16:52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안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북한 핵개발 위기, 상주 사드 배치 등으로 전쟁위기가 한반도 전역을 위협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었는데, 끊겼던 통신선을 회복하고 남과 북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일촉즉발의 숨 막히는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기회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일팀 구성 보도 이후 진행되는 논쟁, 특히 우리가 20·30세대라고 부르는 청년세대의 반발은 통일과 평화라는 대의를 생각하여 묵살해도 괜찮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 하나에 국가 대 개인, 기회의 평등과 절차의 정당성 등등 앞으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다양한 갈등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또 하나의 먼 외국’이라는 말이 있다. 외국이란 거리상으로 먼 나라이지만, 과거 이 땅에서 벌어졌던 역사 역시 후속세대에게는 외국만큼이나 낯설고 먼 이야기이다. 분단 이전의 한반도를 살았던 세대는 물론 전쟁을 경험한 세대도 점차 줄어가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자연스럽게 노래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남북한 모두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통일은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 할 당위적 과제가 아니라 정권 차원의 정략적 의제로 변질되기도 했다. 오늘날 단일팀 문제에 대한 대중의 달라진 반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장준하 선생은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라고 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통일은 ‘조국은 하나다’라는 감상적 구호만으로 접근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과제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남북 모두 서로 다른 역사를 경험한 세대가 주류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평화’는 ‘평화통일’을 의미했으나 오늘날 ‘평화’란 ‘평화분단’을 의미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을 대중의 이기적인 ‘생존 감각’이 ‘통일’이란 민족사의 당위적 과제를 압도한 것으로 비판만 한다면 남북관계는 결코 더 나은 길을 모색할 수 없을 것이다. 청년세대의 혐북감정은 ‘반공’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적 반감,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기회의 불평등·불공정이라는 생활의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이 중국의 벽을 넘거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8강 진출을 이룬 성과 못지않게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는 과정 역시 공정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공동응원을 계기로 남북한 신뢰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를 계기로 남북 체육회담을 개최하여 탁구 단일팀 준비를 진행했다. 청소년축구 역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두 차례의 평가전을 치렀다. 그러나 현재의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의에는 그와 같은 평가 과정이 전무하며 무엇보다 진행과정에서 이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가 없었다. 이후 정부 관계자의 발언 역시 선수에 대한 공감이 아닌 개최지 자동진출권이라거나 메달권 밖이라는 둥 불필요한 이야기들이 언급되었다. 여자 아이스하키팀은 국내에 변변한 실업팀 하나 없는 불모지임에도 국가대표라는 자부심으로 나선 팀이다. 경기 이후 팀의 존속 여부나 선수생명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처지이다. 기성세대의 정략적 편의에 따라 동원되거나 호명되어온 청년들로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소외감과 배신감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남북 단일팀 구성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고조시킨 전쟁의 위기를 풀어갈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또한 평화와 통일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청년들에게 목적(공정한 과정) 없는 수단으로 비쳐선 평화도, 통일도 그 동력을 상실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남북통일에 대한 접근은 주가등락을 살피듯 일희일비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진하며 동·서독 통일의 큰 그림을 그렸던 에곤 바르는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정책을 아무런 환상 없이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해방 이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우리의 노력에 환상 없는 성찰이 필요한 때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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