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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조호연 칼럼]가짜 보수

opinionX 2019. 6. 5. 09:48

보수라면 지켜야 할 핵심 가치가 있다. 자유, 시장경제, 법질서 등이다. 경합할 수 없는 원칙으로는 국익과 국가안보, 한·미동맹이 꼽힌다. 그런데 강효상 의원의 대통령 통화내용 무단공개 사건은 자유한국당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한국당은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나. 

강 의원이 공개한 통화는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방문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3급 비밀이다. 논란의 여지 없이 국가기밀을 누설한 형사 사건(형법 제113조 외교상기밀누설 조항 위반)이다. 그러니 정치공방이 아니라 법으로 다스릴 문제다. 그러나 한국당은 굴욕외교이기 때문에 그 실체를 국민에게 알려야 하며, 강 의원은 그것을 위해 정상적인 의정활동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에게 한 번 와달라, 방한을 구걸한 굴욕외교 아니었나”(나경원 원내대표), “정부의 외교 무능과 국민의 알권리를 숨기기 급급한 행태를 지적하기 위해 하신 일”(황교안 대표). 언어 왜곡과 핵심 돌리기는 말 그대로 ‘한국당스럽다.’

의혹을 제기하려면 합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일국의 정상이 외국의 정상에게 자국 방문을 요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외교 행위다. 더구나 두 정상의 통화 어디에도 굴욕으로 해석할 만한 구석이 없다. 트럼프의 한국 방문에 원칙 합의하고 시기와 일정을 논의한 것이 전부다. 동맹 간에도 동맹 파트너끼리의 게임이 있는 법이다. 이 과정에서 국익을 실현하기 위한 권유와 설득, 요청, 항의는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다. 저자세라는 문제제기는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당은 인정하지 않는다. 보수 내부에서 쏟아지는 비판도 신경쓰지 않는다. “한국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국가로 만든 행위”(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국익을 해치는 무책임한 행위”(윤상현 한국당 의원). 성찰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발된) 강 의원을 (검찰에) 내주지 않겠다”며 방탄국회까지 예고했다.

사실 굴욕외교, 구걸외교라면 한국당이 원조라는 말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에 대해 북측에서는 사과가 아니지만 남측에서는 사과로 해석되는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북한이 발표한 적도 있다. 이 말대로라면 남북정상회담 욕심에 ‘천안함’은 물론 국가 자존심까지 판, 구걸외교의 전형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치다가 벙커에서 넘어지는 민망한 모습이 공개되자 지도자의 참모습이라며 높이 평가한 것은 또 어떤가. 걸핏하면 문 대통령이 트럼프와 통화도, 만나지도 잘 못한다면서 코리아 패싱, 한·미동맹 균열이라고 비판하던 한국당이 정상통화를 문제 삼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전화를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라는 식이니 어쩌란 말인가.

강 의원의 기밀 누설이 국민 알권리란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 ‘국가안보·외교관계 사안으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공개를 유예’(정보공개법 9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황 대표의 변신은 놀랍다. 불과 2년 전 ‘세월호 7시간’ 기록을 30년간 공개되지 않도록 지정해 국민 알권리를 봉인한 당사자가 이제 와서 알권리를 기밀보다 더 중시하고 있으니 믿기 어렵다.

국가기밀제도의 피 맺힌 역사를 안다면 한국당이 이럴 수는 없다. 이승만·박정희 독재 정권이 비판 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8군사령부 소재지는 용산’이라고 말했다가 간첩죄로 처벌받고, 면장 이름과 주소를 알려줬다가 감옥 간 시민이 부지기수다. 숱한 고통과 혼란 끝에야 국가기밀은 “누설되면 국가 안전에 위험성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기밀로 보호할 실질적 가치를 갖춘 것”으로 엄격히 제한됐다. 독재 정권의 맥을 이어받은 한국당이 이제는 국가기밀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있으니 자기 부정이나 다름없다. 한국당은 이 제도에 대해 무겁게 성찰해야 할 도의적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개의치 않는 눈치다. 

이번 사건을 통해 한국당은 정당이라기보다 이익공동체에 가깝다는 것을 입증했다. 필요하다면 보수의 핵심가치를 서슴없이 내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국가기밀제도 무력화를 통해 법질서를 외면했고, 안보나 국익은 아예 당리당략의 하위가치로 전락시켰다. 심지어는 한·미동맹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수의 오랜 경구인 “당리당략이 아니라 국익에 봉사하라”(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니스벳)나 “보수의 가치는 법질서”(미국 정치이론가 러셀 커크의 ‘보수주의 10계명’)는 한국의 제1야당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한국당의 자세는 진짜 보수와 가짜 보수를 판별하는 바로미터다. 그리고 한국당은 이미 선택한 것 같다.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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