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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서 통증을 호소하면 의사가 묻습니다. “통증 강도를 1에서 10까지라고 할 때, 어느 정도 아프세요?” 이른바 ‘통증척도’입니다. 환자의 주관적 느낌이지만, 의사는 이를 통해 진단·치료를 위한 기본 정보를 얻게 됩니다.

귀가하는 여성을 뒤쫓아가 집에 침입하려 한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을 보며 ‘불안척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의 불안과 공포를 남성 중심 사회가 체감하지 못하는 듯해서요. 피해자는 처음 출동한 경찰에게 “폐쇄회로(CC)TV를 확인하고 싶다”고 하지만, 경찰은 ‘건물주에게 연락해 영상을 확보하라’고 한 뒤 3분 만에 돌아갑니다. 결국 피해자가 직접 영상을 확보해 2차 신고를 하게 되지요. 피의자가 자수하자 경찰은 주거침입 혐의로 체포합니다. 시민의 분노가 커지고 청와대 국민청원이 시작되자 성폭력처벌법 위반(주거침입 강간미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합니다. 

‘신림동 강간미수 영상’ 속 30대 남성이 5월31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기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_ 연합뉴스

경찰만 문제일까요. 관련 기사에는 “(피의자가) 호감이 있어 따라간 것 아니냐” “(피해자의) 새벽 귀가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느냐”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최악의 공포를 조롱거리로 삼거나, 2차 가해를 합니다.

통증척도가 의료행위에 활용되는 까닭은 환자의 주관적 평가가 엄살이 아니라 실제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겠지요. 여성들의 불안과 공포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강력범죄에서 여성 피해자 비율은 89%에 이릅니다. 2017년 강지현 울산대 교수가 발표한 ‘1인 가구의 범죄 피해에 관한 연구’를 보면, 33세 이하 여성 1인 가구는 남성 1인 가구보다 범죄 피해를 볼 가능성이 2.3배 높습니다. 특히 주거침입 피해를 당할 가능성은 남성의 11.2배에 달합니다. 

불안한 여성들은 자구책을 찾아 나섭니다. 비혼여성 커뮤니티 ‘반달’ 회원 중 1인 가구주들에게 주거안전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사올 때 안전비용으로 20만원은 쓴 것 같다. 문이 열리거나 닫힐 때 알려주는 홈 IoT, 창문이 밖에서 힘으로 깨지지 않게 하는 방범필름, 누르면 경찰에 신고가 가는 SOS 버튼등등….”(회사원 ㄱ씨·빌라 안 원룸 거주) “건물 현관은 비밀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지만, 실제로는 2층의 음식점을 위해 밤 10시까지 열려 있다. 밤길이 무서워 한 정거장 거리라도 버스를 이용한다.”(회사원 ㄴ씨·오피스텔 거주) 이들뿐이 아닙니다. 혼자 사는 20~30대 여성들은 배달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택배는 근처 편의점을 중간다리로 삼아 나중에 가져옵니다. 남자 신발을 현관에 놔두고, 방범용 남성 목소리를 인터넷에서 내려받습니다. 비밀번호 누른 흔적을 안 남기려고 도어록에 랩을 씌우기도 합니다.

형법상 주거침입죄의 최대 형량은 징역 3년이지만, 실형이 나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최근 서울북부지법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여성에게 상습적으로 협박성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주거침입을 시도한 남성에게 “우울증으로 치료받고 있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주거침입죄에만 관대한 것도 아닙니다. 지난달 31일 부산지법은 여자기숙사에 침입해 여학생을 때리고 성폭행하려 한 남학생을 집행유예로 풀어줬습니다. ‘블랙아웃’ 상태였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검찰 구형은 징역 10년이었습니다. 

환자(여성)는 통증을 호소하는데, 의사(형사사법체계)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반달’ 회원 ㄷ씨(파트타이머)는 “경찰·검찰·법원 등의 구성원 성비와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 이미 만들어둔 법 규정조차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습니다.

2016년 5월17일 서울지하철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당했습니다. 보름 후 박근혜 정부는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여성 대상 강력범죄 종합대책’을 확정했습니다. CCTV 확충, 신축 건물의 남·여 화장실 분리, 여성 상대 범죄자에 대한 법정 최고형 구형 등이 포함됐습니다. 젠더폭력의 배경인 성차별적 사회구조·인식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은 없었습니다. ‘강남역 사건’ 당시 근본 해법을 찾지 못했기에 ‘신림동 사건’으로 이어진 것 아닐까요.

이제는 법정 최고형 구형 수준의 대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식의 전환, 파격적 발상이 절실합니다. 과거 청와대에는 경찰 수사와 첩보 수집을 관리하던 치안비서관(사회안전비서관)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청와대’는 정보경찰의 폐해를 근절하기 위해 이를 폐지했습니다. 저는 치안비서관직의 부활을 희망합니다. 선거개입하는 치안비서관 말고, 여성을 비롯한 약자·소수자의 안전을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여성치안비서관’ 신설을 바랍니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라면 남성에겐 더 안전한 사회가 될 겁니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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