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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국제법상으로 유엔에 가입한 엄연한 국가다. 반면 국내법은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와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반국가단체다. 반면 남북관계발전법은 ‘특수관계국’으로 규정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남북기본합의서가 모태다. 고민 끝에 헌법과 보안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북한과의 교류가 가능해지도록 합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한국 보수는 공식적으로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아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안보를 독점했고, 북한을 협상 상대로 보는 남한의 진보를 공격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분단상황을 극복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정치세력은 보수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북한에 대한 국가성 부정은 보수의 징표가 됐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현상일 뿐이었다. 이면에서 보수와 북한은 적대함으로써 각자의 이익을 취하는 적대적 공생관계였다. 북한이 남한 선거에 개입한 ‘북풍’, 보수가 총선에서 이기려고 총을 쏴달라고 북한에 부탁한 ‘총풍’을 기억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싶어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해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을 만들어 달라고 애걸한 것도 남한 보수정권이었다. 보수는 자생력이 부족한 아이나 다름없었다. 늘 북한을 필요로 했다. 거의 중독 수준이다.

최근 자유한국당이 북한을 공개 소환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공동선언과 남북군사합의서 비준이 위헌이라고 공격하면서다. ‘국회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의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는 헌법 제60조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조약은 국가 간에 하는 것인데, 국내법상 북한은 국가가 아니므로 위헌이 될 수 없다”고 해명했다. 한국당이 계속 위헌 주장을 하려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야 할 상황이 됐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물러서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한국당은 한발 더 나아갔다. 헌법재판소에 비준의 효력정치를 구하는 가처분신청서를 냈다. 선행 선언인 판문점선언에 대한 국회 비준 동의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평양선언과 군사합의서의 대통령 비준 재가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므로 원인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한 국가 안위에 관련된 군사합의서는 ‘안전보장에 대한 조약’에 해당하므로 헌법상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으면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한국당의 자가당착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먼저 판문점선언을 무조건 거부해 본회의는커녕 상임위 상정조차 못하게 만든 당사자로서 대통령 비준 재가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행위의 자가당착이다. 또한 북한의 국가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한 것은 그간 자임해온 보수정당의 전통을 부정했다. 이념적 자가당착이다. 이것은 철칙으로 강조해온 국가보안법과 헌법 3조에 위배되기도 한다. 법적 자가당착이다. 실제로는 북한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인정을 전제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한국당은 전략적 행동이라고 자평할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 입장에서는 사기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한국당의 처지가 그만큼 궁박해졌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남북관계 발전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가고 있다.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체제 구축의 길도 닦이고 있다. 그 바람에 수구·냉전 보수가 활개칠 서식 공간이 매우 좁아졌다. 결정적인 것은 ‘표준국가’ 미국의 대북관 변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 응함으로써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한 것이다. 최근에는 ‘마지막 희망’이던 일본 아베 총리마저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강력 추진하고 있다. 한국당 내부 균열도 심상치 않다. 경기 연천 강원 철원 등 접경지역 한국당 소속 지자체장 4명이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동의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불합리한 당론보다 지역 민심을 우선시한 결단으로 보인다. 이것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국내외로 이념적 외톨이가 된 한국당이 마지막으로 북한 카드를 꺼내든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북한 국가성 인정’ 카드는 양날의 칼이다. 정부를 공격하는 데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언제든 제 몸을 찌를 수 있다. 특히 70%가 넘는 지지를 받는 판문점선언을 공격하는 것은 패착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당의 유일한 희망은 비핵화협상이 깨지고 북·미와 남북이 대결시대로 회귀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한국당은 국민과 싸우게 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제 한국당에 퇴로가 없다는 사실이다.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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