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진눈깨비 흩날리는 늦은 오후. 옷깃을 여미며 지하철을 탔다. 안국역에서 내렸다. 안국(安國), 나라의 평안. 말의 의미가 새삼스러워졌다. 헌법재판소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내 인왕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애석하다, 희뿌연 안개에 가려 산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오랜만에 우러르는 인왕산이다. 어렴풋한 흔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광화문으로 쇄도하는 발걸음에 한 걸음을 보탰다. 광장임에도 숨바꼭질하듯 걸어야 했다. 많은 궁리가 일어났다. 경복궁역에서 청운동 사무소까지 가는 길. 예전 궁리출판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눈 감아도 훤하다. 옆사람과 어깨를 걸고 나아가며 구호를 외쳤다. 특히 다음 일곱 글자에서 울컥, 했다. “국민이 명령한다!” 행진하는 너는, 나는, 우리는 저 문장의 확고한 주어다. 인왕산 쪽 길가에 가로수가 서 있다. 큼지막한 돌화분에 회양목을 울타리 삼아 심어진 무궁화. 총 68그루였다. 나흘 전이 소설(小雪)이었다. 시절에 맞게 오늘 첫눈이 내렸다. 나무는 꽃과 잎을 모두 버렸다. 벌어진 열매 속으로 하늘의 소식이 들어가고 있었다.
대열을 벗어나 잠깐 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정상에서 기습 고함도 질러볼까. 직접 인왕의 안부도 살피고 싶었다. 아뿔싸, 등산로가 폐쇄되었다. 성난 목소리는 이미 북악산 꼭대기까지 넘실대고 있었다. 둘레길을 걷다가 청와대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 섰다. 무무대(無無臺)이다. 돌판에 그 뜻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아무것도 없구나. 오직 아름다운 것만 있을 뿐.” 왜 아니겠는가. 참여자 150만명에 연행자 0명, 부상자 0명이다. 대통령이 내팽개친 국격을 거리의 국민들이 쌓아올리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저 아름다운 품격을 보라!
산에 갔다 온 사이 밤은 깊어졌고 국민들은 늘어났다. 도로에 송곳 하나 세우지 못할 만큼 빽빽했다. 경찰차에는 꽃 스티커도 많이 붙어 있다. 그 사이 무궁화는 여전하다. 이 함성, 이 물결, 이 느낌. 공중을 가득 채운 파동을 무궁화도 흠뻑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년 봄에 얼마나 본때 있게 피어날까, 골똘한 생각에 잠긴 무궁화. 우리나라의 꽃, 무궁화. 아욱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지난 칼럼===== > 이굴기의 꽃산 꽃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멱쇠채 (0) | 2016.12.13 |
---|---|
좁은잎덩굴용담 (0) | 2016.12.06 |
도둑놈의갈고리 (0) | 2016.11.22 |
익모초 (0) | 2016.11.15 |
좀바위솔 (0) | 2016.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