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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 강한 감정이 또 있을까. 사랑, 혹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죽음마저 불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예가 사랑에 빠지는 것, 혹은 자식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억압적인 주인이나 권위적인 부모에게는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노예나 자식은 외적인 권위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일체의 외적 권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혹은 자유의 힘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과거 권위적인 사회는 구성원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극히 꺼렸던 것이다. 노예는 주인이 원하는 짝과 결혼을 해야 하고, 자식도 부모가 정한 상대와 혼인을 해야만 했다.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등장했을 때 인류가 환호했던 것은 바로 자유연애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자유연애를 긍정하는 부르주아 시민사회에서 사랑은 마침내 밀실에 갇혀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사랑이 가진 공동체성, 혹은 공동체적 사랑은 그만큼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제 사랑은 카페나 가정에 갇혀버리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부르주아 시민사회 이전에 사랑은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예수의 사랑도, 공자의 인(仁)도, 그리고 싯다르타의 자비마저도 커플 사이의 사랑을 넘어서 공동체적 차원에서 외쳐지지 않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지배 전략을 직감할 수 있다.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산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깨알처럼 쪼개서 밀실이나 가정 내부의 협소한 범위로 해소시키려는 것! <일방통행로>에서 벤야민이 “부르주아적인 삶이란 사사로운 일들의 체제”라고 말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랑이어도 좋고 분노여도 좋고 동정이어도 좋다. 이제는 카페나 집에서 만나는 사사로운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감정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깨알 같은 공간에서 우리 감정들은 과잉에 가깝게 폭발하기 쉽다. 층간소음도 문제이고, 아이가 왕따를 당하거나 성적이 떨어져 우울한 모습도 문제이고, 부부 사이의 관계도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미 서울역의 풍경이 되어버린 노숙자의 비루한 모습에 대해서, 금융회사에 농락당한 서민들의 눈물에 대해서, 중학교 교과과정을 미리 배우려고 학원을 전전하는 우리 초등학교 학생들의 무거운 캐리어 가방에 대해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공권력의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우리의 감정이 대부분 흘러들어갈 때, 그보다 훨씬 더 넓은 공적 세계에 흘러들어갈 수 있는 감정이 얼마나 있겠는가.

노숙자에 대해, 금융회사의 농간에 대해, 교육제도에 대해,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에 대해, 지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슴 깊이 절절하게 공적인 문제에 감정이 폭발했느냐의 여부, 정말 진진하고 심각하게 그런 공적인 문제에 대해 아파했느냐의 여부이다.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서글픔으로, 때로는 열정이 가슴에 먹먹하게 차오르지 않았다면, 공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적인 분석은 그저 냉소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치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에 훈수라도 두는 것처럼 공적인 문제에 대한 절박함이 없다면, 우리의 지적인 분석이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침내 부르주아 시민사회는 우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셈이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의 감정은 이제 깨알처럼 쪼개진 사적 세계에만 흘러들어가게 훈육된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피폐된 공동체서 느낀 외로움
이씨가 몸과 함께 던진 화두
공동체의 ‘사랑’ 회복되기를”

2013년 12월31일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이남종씨만큼 공적인 문제에 대해 너무나 절박했고 진지했던 사람도 없었다. 공권력이 대선에 개입한 사건, 민주사회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범죄가 단죄되지 않은 채, 새해가 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졌던 그였다. 마치 새해가 되면 모든 것이 새롭게 포맷되기라도 할 것처럼 공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기만 우리들 때문에 그는 조바심마저 가지고 있었다. “많은 국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공권력의 대선개입은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개인적 일탈이든 책임져야 할 분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이상득, 최시중처럼 눈물 찔끔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던 그 양심이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이 아니길 바랍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으나 체감하는 공포와 결핍을 가져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이렇게 고(故) 이남종씨는 우리 곁을 헛헛하게 떠났다. 2014년의 새해가 깨알 같은 사적인 소망을 피력하는 자리가 아니라, 공동체적 소망이 나누어지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고가도로 분신 이남종의 유서 (경향DB)

모든 자살이 그렇듯이, 이남종씨의 분신자살에도 어떤 외로움의 정조가 깔려 있다. 공동체적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권력과 체제에 우리들이 제대로 맞섰다면, 이남종씨가 외로움을 느꼈을 리도 없고, 죽음으로써 민주주의가 능멸을 당하는 현장을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고발했을 리도 없다. 불행히도 고인이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공동체적 사랑, 혹은 공동체를 위한 사랑에 대한 감각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린 것 아닌가. 2014년 1월4일 고인의 영결식이 있던 날, 대다수의 유력 언론매체들은 공동체적 사랑을 갈망했고 우리에게 요구했던 고인을 또다시 외로움에 방치했다. 고인을 두 번 죽이는 만행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깨알 같은 사적인 감정만을 자극하는 뉴스들이 거대한 강물이 되어 흐를 때, 공동체에 대한 고인의 사랑과 명령이 어디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1992년에 출간된 시집 <희망의 나이>를 마무리하면서 시인 김정환은 말한 적이 있다. “사회성과 서정성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 정확히 말해 그것이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내게 시의 문제는 사회적 서정의 수준을 높이는 문제이다.” 이미 부르주아 사회는 공적인 영역에 냉소적인 지성만이 차갑게 작동하고, 사적인 영역에서만 강렬한 정서적 힘이 작동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당연히 이 두 영역의 분리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적 차원, 혹은 공동체적 사랑을 회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김정환은 단도직입적으로 ‘사회적 서정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다.

사회적 서정을 높이는 것, 올해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정말 공동체와 그 속에 살아갈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래서 이남종씨처럼 의롭지만 안타까운 죽음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려면, 남겨진 우리 모두의 가슴에 아로새길 과제는 바로 이것뿐이다. 사랑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사회적 서정의 수준을 높이자! 삼가 이남종씨의 명복을 빌며, 이제 ‘비상경보기’도 더 힘을 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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