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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드라마로 히트를 쳤던 이 제목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니, 이 질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는 어떻게 다른가. 톨스토이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강변했지만, 내가 보기에 남녀 할 것 없이 사람은 ‘일하며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런데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이 문제적이라면 그것은 일반 ‘사람’과는 다른 어떤 삶의 지형 속에 놓여있음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을 제출해야 했던 과거 여성의 삶은 대체로 ‘남자’ 혹은 ‘사랑’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일과 사랑이 대체로 남자라는 운명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조선희의 <세 여자>를 읽으면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과연 조선 최고의 신여성이자 코뮤니스트였던 단발랑의 이 세 여자가 이전까지 여성에게 강제된 ‘남자라는 단 하나의 운명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살았는가’이다. 이 관점에서 세 명의 이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주세죽. 그녀는 함흥에서 태어나 음악선생이 되기 위해 상해로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박헌영을 만나 결혼하고 공산주의자가 되지만, 모스크바에서 박헌영의 단짝인 김단야와 재혼하고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당하는 등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결국 1953년 생을 마친다.

둘째, 강경의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인 고명자는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김단야와 사귀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으며 경성에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전향하여 친일행로를 걷다가 한국전쟁 중 사망한다.

셋째, 허정숙은 고베 유학을 거쳐 상해에서 경성으로, 모스크바와 뉴욕, 타이베이, 남경, 무한, 연안, 태항산, 연안을 거쳐 평양에서 최고 권력을 누리다가 아흔의 나이로 사망한다. 허정숙의 생은 무장항일투쟁 전력에서 알 수 있듯 단순하게 보자면 투철한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의 생이지만, 그 면면은 동선만큼이나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가령 ‘조선의 콜론타이’라 불렸던 허정숙의 남편 혹은 파트너가 여러 번 바뀐다든가 일본, 미국, 대만 등지에서 유학하고 연안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등의 엄청난 행보가 그러하다.

얼핏 보면, 이 셋 중에 남자와 별개로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살아낸 것은 유일하게 허정숙이라 할 수 있다. 주세죽은 박헌영과 김단야라는 혁명가를 뒷바라지하거나 의존하는 헌신적 여성상이었다는 점에서, 고명자 또한 김단야의 행보와 함께하다가 이후 전향 등의 나락을 걸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단적으로 이 셋 중에 허정숙만이 누구의 아내나 애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으므로. 그러나 어찌 보면 허정숙의 저 독립적인 행보에는 아버지 허헌이라는 절대적 운명이 어른거리고 있다. 조선 최초의 변호사 중 하나이자 조선 공산주의의 후원자로 또 동아일보 사장과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종합대학 총장까지 지냈던 허헌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그녀가 자신의 삶을 찬란한 궤도에 놓을 수 있었을까.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두 명과 달리 비극적 역사에 희생되지 않고, 역사라는 호랑이에 올라탈 수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는 특히 평양에서의 허정숙의 삶에 의구심이 든다. 이 작품에서 남로당을 비롯한 소련파, 연안파 등이 숙청당할 때 허정숙의 태도는 회의적이면서도 방관적이다. 첫 번째 남편인 임원근이 형무소에 있을 때 송봉우와 재혼한다든가, 미국 유학을 떠나고 하는 것도 그렇지만 박헌영, 최창익, 임화, 이태준 등이 숙청당하고 김일성 1인숭배체제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과연 어떤 주체였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 의구심은 어쩌면 작가가 허정숙의 행보에 무의식적으로 반발하면서 변명의 시선을 얹고 있기 때문에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이 작품에서 그려진 세 여자의 삶이 그다지 주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 명의 내면적 동력이 좀 더 핍진하게 묘사되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떤 누구도 주체일 수 없었던 저 폭군의 역사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우면서 끝내는 참담했던 것은,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그려나갔던 숱한 혁명가들이 속절없이 역사의 격랑에 희생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무력감을 어찌할 것인가. 남성이라는 단 하나의 운명을 열고 나가면 더 폭압적인 역사라는 운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세 여자>를 읽으면서 느낀 새로운 지점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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