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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미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소설가인 다나는 집에서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휘청,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진다. 이어 눈을 뜬 곳은 1815년 메릴랜드주의 숲속이다. 그곳에서 다나는 호수에 빠진 ‘백인 소년’을 구한 뒤 1970년대로 되돌아온다.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의 대표작 <킨>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후로 다나는 소년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1800년대로 끌려간다. 처음에는 몇 분, 그 다음에는 몇 시간, 그 다음에는 며칠,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수어달. 그렇게 1800년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나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흑인 여자’로서의 생존술을 익히게 된다. 즉 점차 노예로 생존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의 다나는 자유인이자 ‘엘리트 여성’이지만, 1800년대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건방진, 따라서 다소 위험한 여자 노예일 뿐이다.
버틀러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다나를 노예제가 가장 혹독했던 1800년대로 보내 그 시대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에서 ‘흑인됨’이란 무엇인지, 그 역사성을 탐구한다.
하지만 버틀러가 이런 이야기를 쓴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는 가정부 일을 하셨고, 나는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킨>을 쓴 이유는 이런 기분을 풀기 위해서였다. 결국 나는 그녀가 한 일들 덕분에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가 삶을 빠르게 개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좀 더 맹렬하게 부모에게 화가 나 있었던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노예제 시대로 보내고 싶었다.”
버틀러가 말하는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일’이란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이 꽃을 피웠던 시기, 민권운동가들이 노예의 삶을 살았던 윗세대에게 쉽게 격분하곤 했던 것을 의미한다. 어떤 민권운동가들은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부모세대를 진심으로 원망하고 저주했다.
버틀러에게 이런 태도는 맥락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다는 의미에서 순진하고 안일한 것이며, 동시에 자기혐오라는 점에서 무기력한 것이기도 하다. 버틀러의 작품과 수치심의 관계를 탐구했던 프랜 미셸은 ‘수치스럽다’의 또 하나의 표현인 ‘굴욕당한(mortified)’의 어원이 ‘죽음(mort)’임에 주목한다. 수치심을 안고 있는 자기혐오는 변화를 견인하기보다는 자기파괴적이다.
버틀러에게 선조들은 어떤 식으로든 버텨낸 자들이었다. <킨>은 다나가 어떻게 노예가 되어가는가, 그리고 다나가 구했던 ‘다른 백인들과는 조금은 다른 백인 소년’은 어떻게 ‘크게 다르지 않은 백인 노예주’로 성장하는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개인을 구조에 종속시키는 조건 안에서 그렇게 간단하게 발휘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나는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교섭하면서 인간으로서 생존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다나가 머무는 집의 다른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노예화된 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안에서 그 시간을 살아냈고 (혹은 결국 죽거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살았고) 그렇게 버텼거나 버티지 못했던 시간들의 중첩 속에서 역사적인 투쟁들은 불타오를 수 있었다.
여성 인터넷 개인방송 진행자(BJ)에 대한 살해 협박이 공공연하게 인터넷 방송을 타고,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을 볼거리로 만드는 영화가 제작된다.
탁현민 경질을 말했다고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경질 청원이 올라온다. 만만하지 않은 강도로 진행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을 보면서 버틀러의 교훈을 되새긴다.
여전히 우리는 각자의 맥락에서 각자의 ‘노예의 조건’을 산다. 그러나 우리의 발버둥이 아무리 하찮아 보일 때에도 제자리걸음 중인 것은 아니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함께 버텨야 한다. 버텨서 더 많은 목소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밀어낸 어떤 한계가 세상을 또 조금 바꾸어놓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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