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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 목동에 대규모 재건축이 가능해졌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목동 집값 훈풍”이라는 제목이 달린 기사는 그 소식을 환영하는 지역주민들의 반응을 전했다. 재건축 규모는 84㎡의 주택 5100가구가 추가로 공급되는 수준이다. 그 지역은 7년 전 교통 혼잡과 학급 과밀을 발생시킨다는 주민들의 반대로 ‘행복주택’이 무산되었던 바로 그곳이다. 

소유한 사람과 빌려 쓰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동등한 시민’일까? 법 앞에선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러한가?

2013년 행복주택 공청회장에서 자신을 목동 주민이라 밝힌 한 사람은 “청년들이 (행복주택에) 입주해서 내 자식을 때리면 네가 책임질 거냐”라고 소리쳤다. 목동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행복주택의 취지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목동은 이미 교통과 교육이 과밀화돼 있으니 다른 곳에 지으라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행정과 정치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양천구청은 행복주택을 막겠다며 국토교통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정당들은 합심해 행복주택 반대 서명운동을 벌였다. 결국 국토부는 2015년 그들의 바람대로 목동 행복주택 사업을 취소했다. 민·관·정 협의회는 양천구민의 힘으로 목동을 지켰다고 자축했지만, 과연 행정과 정치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켰을까.

‘행복주택’과 ‘재건축주택’은 모두 교통·교육 과밀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두 건축물은 건축법상 동일한 ‘주택’이다. 그러나 재건축주택은 되고 행복주택은 안된다. 같은 주택이지만 다르게 취급된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 따져보면 한쪽은 빌려 쓰는 사람들이 살 주택이고 다른 한쪽은 소유한 사람들이 살 주택이다. 목동 행복주택 님비 상황에 빗대어 세상을 보니, 빌려 쓰는 사람과 소유한 사람은 ‘동등한 시민’이 아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시민들이 집을 소유하도록 함으로써 주거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모두가 ‘내집’을 소유하기 전의 불안은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불안으로 여겼고, 정부는 시민들이 주택을 살(buy) 수 있게 도왔다. 택지를 개발해 무주택자에게 분양하고 신혼부부에게 대출자금을 제공했다. 하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1980년과 2015년을 비교하면 집을 가진 사람의 비율은 단 1%도 늘지 않았다. 정부는 매년 수십만채의 주택을 공급했지만 결과적으로 빌려 쓰는 사람에게는 가지 않았고, 빌려 쓰는 사람의 삶 또한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빌려 쓰는 사람들의 주거가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는 일이다. ‘월세→전세→자가’라는 단계적 시각에서 벗어나, 월세·전세·자가 모두 각각의 주거 형태로 존중되고, 어떤 형태로 거주하든 모멸당하지 않고 주거 계획을 꾸릴 수 있도록 하며, 그 자체로 충분하고 안전한 주거환경이 조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집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 점유하며 살더라도 주거 안정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빌려 쓰는 사람들의 존재를 지워왔다. 세상을 ‘이미 소유한 자’와 ‘앞으로 소유하려는 자’로 구분하는 관점은 ‘빌려 쓰는 사람’의 목소리를 구조적으로 배제한다. 그런 사회에 빌려 쓰는 사람의 자리는 없다.

‘소유하려는 사람’이 아닌 ‘빌려 쓰는 사람’으로 관점을 전환하자. 변화는 소유 주택이 아닌 곳에 거주하는 사람을 ‘소유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빌려 쓰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명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이미 주택을 빌려 쓰고 있는 45%에 가까운 시민들이 자신의 이름과 지위를 되찾는 일이다. 물론 소유권 중심의 사회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빌려 쓰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는 민주주의, 그리고 그런 민주주의가 가능하도록 그들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소유하려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불행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권지웅 |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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