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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으로 택배·배달 주문이 크게 늘면서 17일 오전 서울 시내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직원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택배 상자를 분류하고 있다. 연합뉴스

먼저 겪은 자의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코로나19 사태에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는지 외국에 사는 친구들 안부를 물었다. 부자 나라인 미국과 독일로 일찌감치 떠난 친구들은 난데없이 휴지와 파스타면 기근이라 했다. 생필품 사재기가 없는 나라에서 사는 일이 뿌듯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조차도 휴지를 직접 사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부피가 크다보니 주로 인터넷쇼핑으로 구매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생필품 사재기가 없는 이유는 코로나19 사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안정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굳이 직접 장을 보러 가지 않아도 총알배송, 로켓배송, 새벽배송까지. 사람만 빼고 모든 것이 집 앞까지 배달 가능한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에게도 직접 사는 것보다는 택배로 시키는 것이 현명한 쇼핑이라 알려진 품목이 쌀과 생수, 고양이 모래라고 한다. 고가의 상품은 아니지만 무거운 탓이다. 반면 택배 노동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품목도 바로 저 세 가지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이면 낫지만 엘리베이터도 없는 집에 물건들을 업어서 배달하고 나면 하늘이 핑핑 돈다고 한다. 여기에 한여름이기까지 하면 장정 한 명 잡고도 남는다. 오죽하면 한 집에서 무거운 물건을 한꺼번에 배송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하소연까지 하겠는가.

하루 세 끼 먹는다는 ‘삼식이’도 아니고 ‘육식이’ 정도 되는 아이들이 집에만 머문 지 석 달째에 접어든다. 외출도 외식도 부담스러워지면서 집 현관 앞에도 라면부터 온갖 주전부리 택배상자가 쌓이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바이러스 전파 때문에 직접 마주치지 않는 ‘비대면 배송’도 익숙해졌다. 딴에는 사람노릇 한다며 음료수라도 챙겨 택배 기사님들께 드리곤 했었지만 이제 그런 정마저 나눌 수 없게 되었다.

통계청 자료를 보니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한 지난 1월 온라인쇼핑 상품거래액은 9조1675억원, 이는 전체 소매 판매액(39조5778억원)의 23.2%다. 온라인쇼핑 통계 집계 이후 사상 최대 비중이다. 소비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전체 소비 5건 중 1건 이상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트에는 잘 가지 않지만 휴대전화 문자에는 다양한 택배 서비스 관련 문자가 넘쳐난다. 한국통합물류협회 발표를 보면 택배산업은 2019년 기준 물량 28억개, 매출만 6조3000억원이 넘는 거대 산업으로, 국민 1인당 택배 이용횟수는 연 53.8회다.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은 99.3회 정도 이용한다. 굳이 마트에 가서 생수나 휴지를 사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택배 서비스 덕분이다.

지난 12일,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건물 4층과 5층 사이 계단에서 ‘쿠팡맨’이라 부르는 40대 택배노동자가 숨을 거두었다. 택배노동자의 사망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 이전에도 새벽부터 주말도 없이 가혹할 정도의 노동조건으로 유명한 일이 택배와 화물 노동이었다. 우체국 집배원들도 2014년부터 2019년까지 5년간 92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체국 집배원의 주당 평균노동시간은 55.9시간, 사기업의 택배노동은 더욱 혹독하다. 택배노동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OECD 평균의 2배를 넘어선다. 택배 한 건당 수수료는 비싸봤자 1000원도 되지 않는 현실에서 배송이 빠르게 이루어지려면 택배 분류 업무에 배송기사들이 시달려야 한다. 택배노동자 실태조사를 보면 하루에 6시간 정도는 분류작업에 매달린다. 그만큼 배송 작업에 조급해지고 늦어질 수밖에 없다. 우체국 택배가 조금 더 비싸고 빠른 이유는 그나마 분류 작업이 도급 형태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택배회사들은 집배송 수수료에 이 분류작업 비용을 버무려버린다.

올해는 택배 서비스가 도입된 지 27년째 되는 해다. 편의점을 거점으로 하는 반값 택배도 등장 하고 택배산업의 성장세는 눈부셨지만 이는 누군가의 인생을 사재기해왔던 ‘인간 사재기’의 시장이기도 하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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